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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도 정치와 쇄국 정치의 혼란

세도 정치

세도 정치라 함은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사를 전단하는 비정상적 정치 형태를 말한다. 정조 이후 순조로부터 계속하여 나이 어린 국왕이 등극하자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 정치가 60여 년 간이나 계속되는 이른바 세도 정치기가 나타났다.

세도 정치의 기원은 정조 때의 홍국영에게 있다 하나, 본격적인 세도 정치는 순조 때의 외척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의 세도에서 시작된다.

순조 다음 헌종 때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꺾고 풍양 조씨가 세도를 잡았고, 다음 철종 때에 와서는 다시 안동 김씨가 들어섰다. 세도가 일문이 국가 요직을 독점하고, 세도의 영속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였으며, 관료들도 자파를 채워 수족처럼 부렸으므로, 국정의 기강은 말이 아니었고, 관료의 가렴 토색은 격심하였다. 이리하여, 정치는 극도로 혼란해져 농촌 사회가 황폐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민란이 거듭 일어나는 말기적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농촌 사회의 피폐

농업 사회였던 조선은 농촌으로부터의 세 수입이 국가 운영의 기본 재원이었으며, 그것은 삼정을 통하여 대부분이 조달되었다. 삼정은 토지에서 받는 조세 곧 전정과, 신역의 댓가로 받는 군포 곧 군정과, 백성들에게 곡물을 빌려 주었다가 이식을 붙여서 받는 환곡 곧 환정을 말한다. 이 삼정이 사리 사복만을 채우는 일부 관리의 협잡으로 극도로 문란하여, 국고는 고갈되었으며, 백성의 고난은 말이 아니었다.

농민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수령이 임의로 부과하는 무명 잡세와 정치 문란으로 발생한 수세 전지 및 납세 홋수의 감소였다. 궁방전, 사전 등의 면세지의 확대로 인한 수세 전지의 감소와 신공 납속에 의한 양반의 증가와 노비의 속량, 투탁으로 인한 납세 의무자의 감소로 생겨난 재정 부담을 그 나머지의 농민에게 부가시켰으며, 관료의 토색으로 이농하는 유민이 생겨나자, 그들의 경제적 의무마저 그 나머지의 부락민에게 동징, 인징이란 이름으로 강제 징수하였다. 이로 말미암은 농촌의 피폐상은 말이 아니었다.

민란의 발생

세도 정치로 궁지에 몰리게 된 농민들의 반발은 점차 높아졌다. 순조 10년 이후 거듭 흉년이 들고 괴질이 유행하여 사태가 악화되자, 마침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이어 각지에서 민란, 민요가 일어났다.

세도의 타도와 지방색 철폐를 내걸고 가산에서 1811년 난을 일으킨 홍경래는 불평 많던 서북인과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급속하게 세력을 펴, 한때 청천강 이북을 지배하였으나, 정주성의 함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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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민란도
홍경래 민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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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은 서북인의 단순한 반란이 아니고 세도 정치로 파탄 지경에 빠져들었던 백성들의 반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난은 딴 지방만을 자극하여 드디어는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거듭 일어나게 되었다. 철종 때에 진주 민란을 계기로 개령, 함평, 익산, 공주 등 삼남 각지에서는 물론, 북은 함흥으로부터 남은 제주도까지 파급되었다. 농민의 반항이 점고됨에 놀란 조정에서는 삼정의 문란이 원인이라 하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을 도모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천주교의 박해

1783년 이승훈의 입교로 뿌리가 박히기 시작한 천주교는 점차 민중 생활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조정의 위정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주교 운동은 유교적 예속 생활을 그르치고, 전통적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이질적 종교 체제였고, 나아가 유교 사회 체제에 위협을 주는 도전자로 보였다. 이에, 위정자는 척사 위정을 내세워 사교로 몰아 격렬한 박해를 가하였다. 교회 설립 이듬해에는 벌써 김범우가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목숨을 잃었으며, 정조 15년에는 제사 문제를 가지고 진산 사건이 일어났다. 순조 때에 와서는 반대당을 타도하기 위한 당쟁에 천주교 박해가 악용되어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로 이승훈, 정약종 등 양반 출신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였으나, 교회 활동은 서민 출신 교인들을 중심으로 더욱 자라났으며, 마침내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설정되어, 중국 교회의 감독하에 있었던 조선 교회는 독립하였다.

헌종 때의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에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수다한 순교자가 나왔다. 이후, 고종 때의 병인박해를 거쳐 신앙 생활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100여 년에 걸친 박해 시대에 만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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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는 한국 교회 순교자
축복받는 한국 교회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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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생활에 만족을 얻을 수 없는 혼란한 사회에서 참된 정신적 위안을 찾으려는 자들의 소망은 생명의 위협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어서, 천주교는 잇단 박해 밑에서도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동학 운동의 발생

천주교가 조선 사회 깊숙이 파고드는 데 대하여, 이와 대척적으로 동학 운동을 전개한 것은 최제우였다. 그는 유⋅불⋅선 3교에 터전한 인내천의 사상을 창도하였다. 서학 운동을 배격하고 도탄에 허덕이는 피지배층에게 새로운 정신적 삶을 주고자 나서게 된 그는 1860년 포덕문을 세상에 펴 동학 운동의 기치를 들었다. 그의 동학 운동은 단순히 종교 운동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광제 창쟁을 내세워 사회 구폐를 표방한 사회 운동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곤경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귀의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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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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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가 급속히 자라남에 놀란 조정에서는 동학도 사교로 몰아 탄압하였고,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괴수라 하여 사형에 처하는 한편, 적극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교조의 죽음으로 교세는 주춤하였으나, 표면상 그 운동이 숨은 것뿐이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서양 세력의 접근

지리상의 신발견 이후 동으로 흐르기 시작한 서양 세력의 동방 진출의 역사 조류를 타고 동양으로 진출해 나온 서양 함선은, 정조 이후 자주 우리 해역에도 출몰하였다. 당시 서양 사정에 어두웠던 우리 나라는 우리 해역에 출몰하는 서양 함선을 이양선이라 하여 출입을 일체 금하였다. 이양선은 처음에는 탐험을 목적한 것이었으나, 차차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1832년 충청도 해안에 나타난 영국선 암허스트(Amherst) 호는 우리 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선박이었다. 한편, 184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역시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기해박해에 학살당한 프랑스 신부들의 일을 문책하는 한편, 통상을 요구하였고, 그 다음 해 다시 찾아왔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물러갔다. 헌종 때인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유럽 각국에 의한 중국 침략이 진척됨에 따라 서양인들의 극동 지역에 대한 야심이 싹터 함대가 자주 우리 해역에 출몰하게 되었으며, 헌종 말 이후 더욱 빈번하여 우리 정부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혁신 정치

세도 정치의 혼란 가운데 안으로 국고가 파탄 지경에 이르고 민란이 거듭되며, 밖으로 서양 열강의 촉수가 접근하는 어려운 때에, 정계의 실권자로 등장한 인물이 흥선 대원군이었다. 어린 국왕인 고종의 후견자로 정권을 잡게 된 대원군은, 쌓인 폐단을 일소하고 왕권을 재확립하고자 과단성 있게 혁신 정치를 감행하였다. 세도와 당쟁의 뿌리를 뽑고자 사색, 지방색,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국가를 좀먹던 서원 혁파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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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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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치 기구를 정상화하였고, 3군부를 설치하여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한편, 난마와 같이 흐트러진 법 질서를 세우고자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양반의 특권을 억제하고 사치와 투기를 금하여 풍속 교정에 힘썼으며, 경제 안정을 위하여 환곡제에 따르는 협잡과 불법을 방지하고, 종래 서민만이 부담하던 군포를 호포로 고쳐 양반 계급도 부담하게 하였다.

이처럼 과감한 혁신 정치를 강행하는 한편, 왕실의 위엄을 보이고자 왜란 때 타 버린 채 버려 두었던 경복궁 중수 사업에 착수하였다. 막대한 물자와 자금이 소요되는 이 사업에 원납전, 문세를 거두고, 당백전을 마구 발행하였다. 이리하여, 경제 사정의 악순환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부역과 징발이 과중하여 차차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천주교 박해와 쇄국의 강화

철종 때에 연해주를 영유하여 우리 나라와 접경하게 된 러시아는, 고종 초 자주 두만강을 넘어와 북변을 소란하게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끼게 된 대원군은, 때마침 건의된 이이제이책을 가지고 천주교회와 접근을 꾀하였으나, 시일이 천연되는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느끼자, 청국에서의 박해 소식을 기화로 1866년 종교 박해로서 최대 규모인 병인박해를 감행하여, 이후 6년간에 8천여 명의교도를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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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과 절두산
양화진과 절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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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차에 걸친 통상 요구를 거절당하였던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이 희생되었음을 이유로 무력으로 통상을 강요하고자 함대를 출동시켜 한강 어귀의 강화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강경 정책과 한성근, 양헌수 등의 선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 병인양요로 쇄국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고종 즉위 후 열강의 통상 운동은 활발하였다. 옵페르트(Oppert)는 거듭 통상하고자 노력하다 실패하자, 무도하게도 덕산 굴총 사건을 일으켜 국민의 분격을 샀다. 그보다 앞서 평양서 소각당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General Sherman) 호도 통상의 기회를 얻고자 나타났던 것이다. 제너럴 셔어먼 호 사건의 소식을 접하게 된 미국도 무력으로 국교를 열고자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켰으나, 어재연과 강화 수비병의 선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871).

거듭 두 차례에 걸친 양요에 승리를 거둔 대원군은 쇄국 양이의 배외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국민적인 적개심을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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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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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개화와 정한론

일본도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취하였으나, 1854년 미국의 무력 시위에 굴하여 개국하게 되었다. 개국을 한 후 내부 혼란이 거듭되더니, 260여 년 간 일본을 지배하던 토쿠가와의 에도 바쿠후는 마침내 쓰러지고 천황 친정의 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의 새 정부는 급속도로 국가 체제를 혁신하는 메이지 유신 운동을 일으켜, 아시아 최초의 근대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새 정부의 설립을 통보해 왔으나, 그 서식이 종래의 관례와 상이하다 하여 접수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그의 쇄국 정신에 비추어 서양 제국과 통교하는 일본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 쇄국으로 대하였던 것이다. 국교 교섭이 좌절되자, 일본 국내에는 성급하게도 침략적인 정한론을 주장하는 자까지 나타나, 심상하지 않은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대원군의 하야와 개국

1863년 이래 10년간에 걸친 대원군의 집정은 공과 과오가 비등한 혁신 정치요 쇄국 정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근대화라는 세계사의 조류에 역행하는 은둔국의 자리에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또, 사회 각층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반 대원군 경향이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대원군을 정계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운동의 핵심은 민비를 중심한 여흥 민씨였는데, 그들은 최익현을 위시한 유림 세력을 이용하여 마침내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 냈다. 따라서,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씨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 연구 과제 ▦

1. 우리 향토에 있는 향교, 관아, 사찰 등에 관하여 조사하고 그 내력을 알아보자.

2. 조선 초기의 관제, 학제, 과거 제도, 토지 제도, 통신, 교통 제도 등을 도표로 작성하여 살펴보자.

3. 조선 시대의 학문, 예술 등 민족 문화의 발달을 연구하여 보자.

4. 왜란, 호란이 우리 나라 사회 제도, 사회 생활에 끼쳤던 영향을 살펴보자.

5. 사화와 당쟁 발생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연구하여 보자.

6. 실학 운동의 여러 선구자의 업적에 관하여 연구하여 보자.

7. 흥선 대원군의 공과에 대하여 토론하여 보자.

8. 조선 말기 우리 나라와 외국 세력과의 관계를 연대표로 만들어 보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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