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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한 민국의 수립과 시련

민족의 해방

1910년 경술 국치의 그 날부터 전개된 줄기찬 민족의 항일 투쟁은 마침내 중⋅미⋅영 3국에 의한 카이로 회담에서의 한국 해방의 결의로써 보답되었다.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은 1945년 7월 포츠담(Potsdam) 선언으로 재확인되었다. 연합군의 억센 공격으로 패전의 기색이 짙던 일본은 일본 본토에 대한 원자탄 세례와 소련의 참전으로 결국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1945년 8월 15일은 감격스러운 민족 해방의 날이요, 조국 광복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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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그 날
해방의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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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해방은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온 단순한 선물은 아니다. 유명 무명의 수다한 독립 운동이 연합 각국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고귀한 성과이며, 피를 흘려 쟁취한 독립인 것이다.

군정과 반탁 운동

8⋅15의 해방은 민족의 희원과는 달리 자치 정부의 수립이 허용되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즉, 얄타(Yalta) 밀약에 의하여 우리 국토는 북위 38° 선에서 양단되었고, 그 남북에는 각기 미⋅소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고초는 이로부터 초래되었다.

1945년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 신탁 통치안이 가결되자,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온 국민은 맹렬한 반탁 운동에 나섰다. 1946년 1월 소란한 정국 가운데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나, 반탁 운동을 전개한 민족 진영의 거세를 주장하는 소련의 고집으로 결렬되었고, 1947년의 제2차 공동 위원회도 소련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한국 문제 해결의 합의에 실패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로 정계의 혼돈은 더하였고, 이의 타개를 위하여 민족 진영에서는 자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좌우 합작이라는 이름으로 국민과 혼란을 조장하더니, 마침내 영남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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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운동
신탁 통치 반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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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의 수립

한국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미⋅소의 교섭이 난국에 부닥치자, 미국은 1947년 9월 유우엔 총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제출하였다. 유우엔 총회는 유우엔 감시하에 전국에 걸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의 독립 정부를 수립할 것을 가결하고, 이 임무를 담당할 유우엔 한국 위원단 설치를 결의하였다. 유우엔 한국 위원단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소련의 반대로 결국은 북한에서의 총선거 실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1948년 2월, 유우엔 소총회는 다시금 가능한 지역에서의 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1948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유, 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으며,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되었고, 헌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조직되어, 8월 15일 대한 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대한 민국은 우리 나라 유일의 합법적 정부이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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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대한 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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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과 유우엔

유우엔은 대한 민국 수립의 산파적 역할을 하였거니와,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우엔 총회는 대한 민국 정부가 한국에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하였으며, 한국의 발전을 돌보기 위하여 항구적인 유우엔 한국 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미국은 1949년 초에 우리 정부를 승인하였고, 이어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자유 진영의 여러 나라가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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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엔 총회 광경
유우엔 총회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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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치하의 북한

종전과 더불어 38°선 이북으로 진주한 소련군은 그들의 주구인 공산당을 내세워 전통적으로 추진해 오던 남침 정책을 실현하고자 광분하였다.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비호하에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을 거세하고 북한 전역에서 날뛰었다.

유우엔의 결의에 의한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공산 괴뢰 국가를 수립하였고, 전 한국의 공산화를 위하여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 폭동, 여수⋅순천 반란 등을 일으키고 각지에 게릴라전을 펴 수다한 양민을 학살하고, 막대한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편, 그들은 38°선 이북에서 소련군의 비호하에 20여만의 군대를 편성하여 호시 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았다.

6⋅25 사변의 시련

공산군은 미군 일부가 한반도에서 철수한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공산군의 남침에 대하여 긴급 소집된 유우엔 안전 보장 회의에서는 침략 공산군의 철퇴를 요구하고, 한국에 유우엔군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자유 수호를 요구하는 유우엔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은 물론, 이디오피아, 콜롬비아 등 16개국이 한국에 군대를 출동시켜 유우엔의 기치하에서 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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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엔군 묘지
유우엔군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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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엔군은 부산 교두보에서 반격을 개시하고, 한편 인천 상륙 작전을 전개하여 전세를 만회하고, 유우엔의 결의에 따라 38°선 이북의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불법적 개입으로 유우엔군은 한때 서울 이남으로 전략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1951년 4월에 유우엔군은 적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몰아 냈다.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공산군은 소련을 통하여 휴전을 제의해 왔으며, 2년간에 걸친 휴전 회담은 국토의 통일 완수를 바라는 한국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3년 7월 휴전 협정의 조인을 보게 되니, 3년 1개월에 걸친 전란은 일단 휴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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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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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사적 의의

기백만의 인명이 살상되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며, 막대한 물질적 소모를 가져온 6⋅25 사변은 결국 통일을 보지 못한 채 휴전선에 의한 국토의 분할이란 원점으로 귀착되었으나, 그것이 지닌 세계사적 의의와 민족사적 의의는 크다. 불법적인 공산군의 6⋅25 무력 침략은 자유에 대한 도전이며 모독이었다. 유우엔군의 출동은 인류 사상 최초의 집단 안전 보장 정신에 의한 경찰 행동이었다. 한편, 6⋅25 사변은 자유 진영의 군사력 강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근대 과학 무기가 총동원되고 좁은 국토에서 막대한 병력이 밀고 당기는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전쟁 피해를 입은 국토는 황폐하고,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었다. 전투원뿐만 아니라 공산군에 의한 학살, 납치로 인한 비전투원의 피해도 놀랄 만큼 컸다.

6⋅25 사변의 피해
한국군 전사 227,748 민간인 피살 128,936
실종 43,572 부상 229,625
부상 717,083 납치 84,532
유우엔군 전사 36,772 행방 불명 303,212
민간인 사망 244,663 가옥 피해 594,190
전사 편찬 위원회

전란을 통하여 한국민의 자유 의식과 반공 정신은 더욱 강화되었다. 수백만의 북한 동포가 전선의 혼란을 틈타 결사적으로 남하했으며, 공산 전쟁 포로 가운데서도 4만여 명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다. 공산군의 만행을 눈으로 보고 허위를 체험한 우리 국민의 반공 의식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확고한 것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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