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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사 시대의 문화
  • (1)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1)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우리 나라의 구석기 문화

아시아 대륙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5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불을 발견하여 사용했고, 돌을 깨고 때려서 만든 타제 석기를 연모로 삼아 사냥을 하고, 또 사냥을 한 짐승의 살을 저며서 먹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동굴이나 물가에서 살았다.

약 50만 년 전의 유적인 상원의 검은모루 유적을 비롯하여 제천의 점말 동굴, 공주의 석장리, 청원의 두루봉 동굴 등은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적임이 밝혀졌다. 이 중에서 공주 석장리의 유적은 후기까지 계속된 유적으로, 웅기 굴포리의 물가 유적과 함께 후기 구석기가 많이 나왔다. 특히, 점말 동굴에서는 중기 구석기 시대 사람의 얼굴을 새긴 코뿔소의 뼈도 나왔다. 이와 같이 각처에서 유적들이 조사됨에 따라 한국 구석기 문화의 모습은 점차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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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구석기(외날찍개)
전기 구석기(외날찍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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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구석기(긁개)
중기 구석기(긁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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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구석기(밀개)
후기 구석기(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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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문화의 발달

신석기 시대의 특징은, 농경과 목축 등으로 식량을 생산할 줄 알고,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함경 북도 웅기, 평안 북도 만포진, 부산시 동삼동 등지에서 출토된 원시 무늬 없는 토기〔原始無文土器〕는 모양이나 크기가 작고 제작 기술이 거친데, 이것이 가장 오랜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 알려져 있다.

한편, 기원전 4천년경부터, 시베리아, 몽고 지역의 신석기 문화와 같은 계통인 빗살 무늬 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한 갈래는 요동(랴오뚱) 반도에서 우리 나라 서해안 지역으로 들어와 한강 이남까지 퍼지고, 다른 한 갈래는 동만주 지역에서부터 동해안으로 내려와 남해안에 이른 듯하다. 그리고, 또 한 갈래는 산뚱 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서부 지방에 들어 온 듯하다. 석기와 골각기, 돌그물추, 돌화살촉 등이 이들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빗살 무늬 토기 제작인들은, 초기에는 주로 어로와 수렵 생활을 하였으나, 점차로 농경법도 알게 되어 조, 피, 수수 등을 재배하였다. 그리하여, 생활이 안정되고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점차 정착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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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 무늬 토기
빗살 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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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가옥으로는 원형 또는 방형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웅기 조개무지의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화덕과 유사한 난방 장치가 발견되었다. 또한, 이들은 직조 기술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산업은 농경, 어로, 수렵, 베짜기 등 여러 가지였으나, 신석기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서는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의 씨족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사회에서는 족외혼이 행해지고, 씨족마다 생활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한편, 당시의 일상 생활은 자연 환경의 제약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는 밀접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애니미즘이 생기고, 자기 씨족의 기원을 동물이나 식물과 연결시키는 토테미즘까지 성립되었다.

그들은 생산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산신, 바다신, 바람신, 비신 등 기후를 맡은 신에 달렸다고 믿었다.

그리고, 웅기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인골들은 모두가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음식을 담았던 그릇이 머리 곁에 놓였으며, 돌화살촉 한 묶음도 같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은, 그들이 태양을 천신의 대표로 믿고 또 죽은 뒤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음을 말해 준다. 또, 각 씨족들은 시조신이 자기 씨족을 보호해 준다고 믿어 시조신을 모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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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껍데기 가면
조개껍데기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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