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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국 시대의 예술

고대 예술의 발전

민간에서는 그들의 전통을 찬미하는 설화나 노래, 그리고 음악 등에 부족 국가 시대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배층 사회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보다 세련되고 다채로운 귀족 예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동에 주동적인 구실을 한 것은 불교 예술로서, 사원의 건축과 불상 제작이 활발하였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화려한 면이 새로 가미되었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신라 토기와 같이 전통적인 소박한 체질을 그 대로 담고 있는 미술품이 있는가 하면,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과 같이 세련미의 극치에 도달한 미술품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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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
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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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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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예술은 각각 그 특징이 있었다. 고구려 예술품은 힘과 정열이 넘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고구려 와당에 나타나 있는, 귀신이 분노하고 있는 형상은 백제나 신라의 것보다도 힘찬 기상을 사실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백제의 예술품은 우아하고 미의식이 가장 세련된 것이었다. 또, 신라 예술품은 소박한 부족 국가 시대의 예술의 전통이 남아 있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삼국 시대 말기에 와서는 엄격하고도 조화미가 넘치는 신라 고유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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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인동 당초문
고구려의 인동 당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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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풍부한 벽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구려 고분은, 전기에는 주로 석총으로 되어 있었으나, 후기에는 토총 형식으로 변하였다. 석총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그 앞에 광개토왕비가 있어서 그의 능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장군총은 방형 계단식으로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올렸는데, 맨 아래층은 길이가 약 30미터이고, 높이는 약 11미터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넓이와 높이를 줄여서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토총은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횡혈식 석실이 있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강서 고분이다. 이 석실에 그려진 사신도는 고구려 벽화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흑, 백, 청, 주홍, 갈색 등의 색깔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힘과 패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사신도 외에, 그 당시의 생활 풍속이나 가옥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있고, 수렵이나 전쟁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용강의 쌍영총에는 서방 계통의 영향을 받아 전설과 후실 사이에 팔각형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고구려 불상은 중국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다른 미술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은 그 표현에 있어서 고구려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한편, 광개토왕비는 선돌이라는 전통적인 양식에다 새로운 문화의 산물인 한문을 써 넣은 것으로, 그 글씨체가 기운차고 독특하여 오늘날의 서도에서도 이를 많이 모방하고 있다.

백제의 유물, 유적은 많이 파괴되어 남은 것이 적으나, 금동불, 석불, 석탑 등 불교 관계의 유물을 비롯하여, 고분과 그 안에 그린 벽화, 와당, 문양전 등이 약간 남아 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 고분은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분이다. 웅진 시대의 공주 고분에는 횡혈식 석실 고분과 무녕왕릉 같은 전축분이 있는데, 이 전축분의 건축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웅진 시대의 것은 아직 소박하고 고졸한 맛이 남아 있으나, 사비성 시대에 와서는 귀족 미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만들어진 능산리 횡혈실 석실 고분을 보면, 그 규모는 작으나 건축 기술과 벽화가 크게 세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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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녕왕의 금제 관식
백제 무녕왕의 금제 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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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석불 중 소박한 옷차림을 한 서산의 마애 삼존불상은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 백제인의 호흡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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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 삼존불상
마애 삼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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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형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잘 잡히고 건축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나타낸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사비성 시대의 백제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는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와 같이, 여⋅제 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패기가 넘치고 조화된 아름다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수한 건축물로서는 분황사 석탑과 첨성대가 있으며, 백제의 아비지가 건축한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다.

통일 전의 신라 고분은 적석 목곽분, 옹관묘, 석실묘 등이 있고, 규모가 큰 것은 대개 적석 목곽분이다. 이 고분들의 부장품으로 금관, 금팔찌,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금 세공의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나, 미의식에 있어서는 전시대의 소박성을 그대로 지닌 것이다.

그러나,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같은 것은 비교적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그림의 전통이 있었으므로, 뒷날 솔거가 황룡사 벽화나 분황사 관음 보살상 등의 명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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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동서 단면도
천마총 동서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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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와 음악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춤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적 재질은 중국 음악과 불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삼국 시대에 와서는 상당히 발달하였다. 삼국 시대의 노래로서는 신라의 향가가 대표적인데, 진평왕 때에 지은 혜성가 등이 전하고 있다.

악기로는 고구려의 관악, 현악, 격타악 등 17종이나 있었다. 고구려 사람 왕산악은 진나라 7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곡조 100여 곡을 작곡하였으며, 뒤에 옥보고가 신라 음악에 맞는 30여 곡을 새로 지었다 한다.

대가야에는 가야금과 그 악곡이 있었는데, 가야가 망할 때 왕궁의 악사였던 우륵이 이를 신라에 전하였다. 이리하여, 신라 음악에는 대⋅중⋅소 피리의 3죽과 거문고, 가야금, 비파의 3현이 주요한 악기로 되었다.

백제의 음악은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며, 일본에 흘러들어가서 일본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그들을 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다.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성왕 때에는 불교를 전해 주었고,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 및 미술, 공예의 기술자를 보냈다.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 쇼오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고, 지묵의 젯법까지 전해 주었다. 일본의 자랑거리인 호오류우 사의 벽화도 담징의 그림을 복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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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류우 사 금당 벽화
호오류우 사 금당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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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인의 일본 진출도
삼국인의 일본 진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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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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