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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발해의 건국과 발전

(2) 발해의 건국과 발전

발해의 건국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 운동이 계속되었다. 그 때, 요양에 있던 거란인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같이 있던 고구려인 대조영도 일족을 이끌고 지린 성 뚠화 현 동모산에 와서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합하여 연합 국가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으로 하였다가(699), 뒤에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중국 북쪽에 있는 돌궐과 연결하여 당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안으로 말갈족의 통합에 힘써, 곧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지금의 연해주 지방까지 걸치는 대판도를 이루었다.

정치 조직

발해의 관제는 중국의 3성 6부를 본떠서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부를 두고, 그 아래에 충부(이부), 인부(호부), 의부(예부), 지부(병부), 예부(형부), 신부(공부)의 6부를 두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듯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많아서 발해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 지배 체제를 구성함에 있어서,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 아래에 선조성의 장관인 좌상은 충부, 인부, 의부를, 중대성의 장관인 우상은 지부, 예부, 신부를 감독하는 2원적인 지배 체제를 이루었다.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는 모든 귀족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으므로, 국사를 의논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그 최고의 관청을 정당성이라 한 것 같다. 또, 전국의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나누었고, 군대는 8위로 조직하여 각 위마다 대장군과 장군을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발해의 문화

발해의 수도인 상경(동경성)에서는 귀족 문화가 발달하여 만주 지역의 문화 중심지가 되어 말갈족을 크게 자극하였고, 또 정비된 관제를 마련하여 말갈족의 여러 부족을 이끌어 나갈 만한 기반을 닦았다.

수도 상경은 당나라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먼저 외성을 두르고, 임금이 있는 궁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뻗은 주작대로라는 큰 길을 내고, 그 좌우에 여러 갈래의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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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상경(동경성) 성지 복원도
발해의 상경(동경성) 성지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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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지에서 발견된 와당, 벽돌, 석등 등을 보면 직선적이고 패기가 넘치던 고구려 미술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도 웅건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발해의 자기는 가볍고도 투명한 광택이 당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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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벽돌
발해의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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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석사두
발해의 석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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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당의 무역 관계가 성립되면서, 발해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한서, 삼국지, 진서(晋書) 등 서적을 수입하였으며, 9세기 초부터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그 중에서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왔고, 외교 사신이나 승려들 중에는 한시에 능한 사람이 많았다.

발해의 대외 관계

발해의 세력은 8세기 초 무왕 때에 이르러 크게 떨쳤다. 이에 불안을 느낀 당은 쑹화 강과 헤이룽 강의 합류 지역에 있던 흑수부라는 말갈족을 꾀어 발해와 대립하게 하였다.

이러한 당의 태도에 노한 무왕은 흑수부를 치는 동시에 장수 장문휴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산뚱 성의 떵조우를 공격하게 하였다(732). 이에, 당은 신라와 동맹하여 남, 서 양면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갔다.

이 사건 이후 당은 신라가 차지한 대동강 이남 지역의 소유를 정식으로 승인하면서, 신라로 하여금 발해와 대립하게 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 뒤부터는 발해와 당과의 평화 관계가 다시 성립되어 무역이 빈번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모피류, 산삼, 말 등이었고, 수입품은 주로 당의 직물류, 책, 공예품 등이었다.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자주 보내어 당의 문화를 수입하는 한편, 바다 건너 일본과도 무역 관계를 맺어 동해의 해로가 개척되었는데, 이것은 신라에 대한 견제책의 의미도 가지는 것이었다.

발해사의 의의

발해는 220여 년 간 존속된 나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 지역을 우리의 활동 무대로 유지시켰다는 점과, 이 나라의 지배 세력이 고구려 유민이었고 그 문화적 기반이 고구려의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발해 시대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신라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만주 지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지배권을 계속 확보하고 있었고, 뒷날 거란의 침입으로 망할 때에도 그 상류층들은 고려의 민족 통일 운동에 포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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