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3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3차
  • Ⅳ. 근대 사회
  • 2. 민족의 독립 운동과 민족 문화의 수호
  • (3) 민족 운동의 성장

(3) 민족 운동의 성장

식민지 통치의 강화

일본은 무력으로 3⋅1 운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한민족의 단결과 저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무단 통치로 지배를 연장하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일본의 무단적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비판하는 여론도 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통치 방식을 바꾸어 이른바 문화 정치(文化政治)를 내외에 표방하였다.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이 임명되어 오던 총독을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다. 또한,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 등의 민족계 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교육을 보급시킨다고 선전하였다. 요컨대, 일제의 선전대로 하면 한국민에게 문화적 통치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의 변경일 뿐,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민족의 근대적인 성장을 억압하고 독립 의식을 근본적으로 말살시켜 한국민을 하등 일인화시키려는 고차적인 통치 방식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1945년 한국에서 축출당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오히려 경찰의 수는 헌병 경찰 때보다 배나 늘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 의식을 말살하려는 고등 경찰이란 것이 생겼고, 감옥도 증설하였다. 신문에 대한 검열도 실시하여 삭제, 압수, 정간을 다반사같이 자행하였다.

한편,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결과로 그들의 자본주의의 터전이 잡히자, 그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경제적인 착취를 보다 강화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절실한 식량 문제의 대책과, 특히 3⋅1 운동 전후에 악화된 식량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의 농토를 개량하고 수리 시설을 확충하였으며, 또 쌀의 품질도 개량하였다.

그러나, 15년이란 장기 계획하에 추진된 이 계획은 연년 계획된 증산량을 채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은 목표량대로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이 끝난 1933년을 표준하더라도 한국의 증산량을 훨씬 넘는 쌀을 가져갔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농민의 굶주림은 계속되었고, 일본에 쌀을 제공하기 위하여 노동력과 수리 조합비, 비료 대금, 곡물 운반비 등 새로운 착취가 증가되었다.

미곡 생산량과 대일 수탈량(단위 : 만 석)
연도 생산량 수탈량
1920 1,270 185
1922 1,432 340
1924 1,517 475
1926 1,497 544
1928 1,730 742
1930 1,370 540
1932 1,590 760
1933 1,630 870

임시 정부의 활동

대한 민국(大韓民國) 임시 정부는 3⋅1 운동 중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1919. 4.). 이 사실은 한민족이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되찾으며, 국내외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을 구성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1 운동은 처음에 종교 단체와 교육 기관을 통하여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족 운동의 중개 역할을 하였을 뿐이며, 강력한 통일 조직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한편, 해외에서 추진되던 독립 운동도 지역마다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 발발 후에 수립된 임시 정부(臨時政府)의 명칭을 가진 것만도, 처음에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에서의 한성 정부, 시베리아에서의 노령 정부, 서⋅북간도에서의 군정부 등 여러 갈래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 민족을 이끌고 보다 강력한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하나의 정부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의 임시 정부를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립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임시 헌법을 갖추었고,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과 국무원(國務院)이 양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공화 정체(共和政體)의 정부였다.

대한 민국 임시 헌장 선포문

인민 일치(人民一致), 중외 협응(中外協應), 한성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 간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선언하고, 국민의 신의로써 완전히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히 자주 독립의 복리를 아(我) 자손 여민(子孫黎民)에게 세전하기 위하여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로써 임시 헌장을 선포함.

대한 민국 임시 정부

확대보기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
팝업창 닫기

임시 정부와 국내 국민과의 연결은 연통제(連通制)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연통제는 전국의 도⋅군⋅면마다에 독판, 군감 등의 행정 조직을 정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이 제도는 모든 한국민으로 하여금 다 같이 독립 운동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가령, 국내 국민은 이 조직을 통하여 임시 정부의 지시를 받을 수 있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 정부에 보냈던 것이다.

임시 정부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수합하고,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한편, 그 해 5월에는 외교 총장으로 선임된 김규식을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그 후, 외교 활동에 주력하여 구미 위원부를 두어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시켰다. 또한, 임시 정부의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발행하고, 사료 편찬회를 두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일제의 침략사를 기술한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여, 밖으로 한국의 자주성을 선전하고 안으로 국민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독립군의 항전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100여만의 한족을 기반으로 하여, 국치를 전후해서부터 독립 운동 기지화가 꾸준히 추진되어 무장 독립군을 편성한 항일 단체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항일 단체들은 3⋅1 운동 발발 후,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목표로 서둘러 편제를 정비하고 무장을 갖추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일제 군경과의 항전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에, 국내에서 수많은 청년이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항전에 가담함으로써 새로이 편성되는 독립군 부대가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서⋅북간도에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군, 대한 의용군, 광복군영군 등으로 불리는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1920년대의 독립군의 항일 전사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항전 중에는,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 독립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이 거느리는 북로 군정서군의 청산리 대첩의 전과가 가장 컸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독립군 본영을 공격해 오는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봉오동에 유인, 포위하여 괴멸시켰고, 청산리 대첩에서는 일본군 연대 병력 이상을 청산리 80리 계곡에 끌어들여 전후 4일간에 걸친 격전 끝에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확대보기
청산리 대첩 때 사용된 독립군의 무기
청산리 대첩 때 사용된 독립군의 무기
팝업창 닫기

이를 전후하여 일제는 독립군의 항전을 식민지 통치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고 독립군과 그 기반을 제거시키고자, 서⋅북간도에 한국 내에 주둔한 이른바 조선군과 관동 지방에 파견된 관동군 및 연해주에 출동한 포조군(浦潮軍)의 사단을 동, 서, 남의 세 방향에서 동원하여, 독립군의 포위 정벌은 물론, 그 기반이 되는 한국민에 대한 대량 학살과 촌락의 방화, 약탈을 감행하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1920).

경신참변 이후 많은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흩어졌으나, 그 주력 부대들은 소⋅만 국경에 자리잡은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 일을 총재로 하는 하나의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노령으로 이군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 곳에서 약소 민족을 후원한다는 적색군에게 배신당하여 무장 해제까지 당하는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러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수없는 애로를 극복하면서 재정비에 착수하였고, 이와 아울러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지안 현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대안 지방에는 임시 정부의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가 성립되었고, 또한 지린성(吉林省)과 풍톈 성(奉天省)을 중심으로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어, 남만주 지방에서의 한족 행정부로 성장해 갔다. 그리고, 북만주에서는 자유시 사변 이후 노령에서 되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하여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만주의 여러 독립군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셋으로 통합되었는데, 이들은 각기 그 곳 한족의 자치를 집행하는 민주적인 체제의 민정 기관1) 3부의 민정 기관은 각기 민주주의에 입각한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립 체제를 채택하였고, 헌법이라 할 각 부의 완비된 헌장을 제정하여 입헌적 정치 조직을 갖추었다. 관할 홋수도 각기 1만 5천 호 이상이었다.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은 군정 기관을 아울러 갖춘 것이었다. 이들은 그 후 대동 통합까지는 이룩하지 못했으나, 무장 독립군의 항일전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독립군의 항전을 탄압하고자 경신참변 후에도 수시로 그들 군경을 출동시키는 한편, 만주의 군벌 장쭤린과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중⋅일 공동 작전으로 독립군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군과 그 밖의 민족 운동자들은 그들이 적대시하지 않는 중국 군경에게 붙잡혀 일본에게 인도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으나, 만주에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이 생길 때까지 일본 군경과의 항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만주사변 이후 반만 중국군과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끝까지 항전하였고, 만주가 일본의 실제적 지배로 들어간 후에는 중국 대륙 혹은 연해주로 흩어지기도 했다. 이 때, 중국 본토로 들어간 독립군은 후에 임시 정부의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

국내에서는 3⋅1 운동 이후 일제의 침략 정책이 한국 문화의 해체와 경제적 착취의 강화에 중점을 두는, 보다 근대적인 식민지 지배 방식으로 바뀌게 되자, 민족 운동도 이에 대응하여 특히 문화, 경제 방면에서 근본적 민족 역량의 배양을 도모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먼저 교육면에 있어서, 일제의 여전한 차별적 식민국 교육에 대항하여 근대 교육을 발전시켰다. 전국적으로 취학자가 증가하고 사립 학교, 강습소, 야학(夜學) 등이 세워졌다. 또한, 조선 교육회의 설립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으로 민족주의 교육의 풍토가 조성되었다. 언론에 있어서는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 그리고 많은 잡지가 민족의 성원 속에 근대적 저어널리즘을 일으켜 근대 의식을 크게 성장시켰다. 또한, 종교 활동에 있어서도 민족 운동과 결부되어 근대 종교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특히, 천도교와 대종교는 민족적 종교로서뿐만 아니라 직접 민족 운동에 가담하여 큰 자취를 남겼고, 불교와 크리스트 교도 민족 의식 고취에 이바지하였다. 주체적 입장에서 혁신된 원불교가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편 것도 이 즈음이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민족적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은 바로 민족 기업의 육성과 민족 자본의 형성에서 이룩될 수 있으므로, 그 한 방법으로 물산 장려 운동(物産獎勵運動)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조만식 등에 의하여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어, 자급 자족, 국산품 장려,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실천 요강이 마련되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갔고, 청년회, 소년단 등이 호응하여 단시일 내에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 정책에 휘말리어 자립적 민족 자본의 형성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물산 장려회 궐기문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 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

한편, 3⋅1 운동 이후 직접적 독립 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조건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 방향이 모색되어 추진되었는데, 그 하나가 사회주의와의 연결이었다. 마침 러시아의 공산 혁명이 성공되어 레닌은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에 대한 원조를 선전하였다. 이런 자극에 의하여 먼저 국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대두되었고, 그것은 국내외로 번져, 그 후 우리 나라 독립 운동에 큰 암영을 던졌다. 상하이에서 일어난 고려 공산당을 비롯하여, 연해주의 공산당, 일본의 무정부주의 운동, 국내의 조선 공산당 등 그들 내부에도 여러 계보 간의 파쟁이 심한 이와 같은 사회주의 풍조는, 식민지 통치에 신음하는 사회적 조건과 항일 독립을 추진하는 민족적 과제를 교묘히 틈타 만연되었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3⋅1 운동을 잇는 거족적인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1926). 이어서, 광주(光州)에서 한⋅일 학생 간에 민족 감정에서 온 충돌 사고가 생긴 것을 계기로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1929). 다음 해까지 이에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학생이 54,000명에 달하여 3⋅1 운동 이후의 최대의 학생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 두 운동에도 공산주의 세력이 끼여들기는 하였어도, 그들의 역할은 보잘것 없었고, 도리어 민족 분열의 상처만 만들었다.

그런 중에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연계되어 민족 단일 조직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고(1927),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등의 투쟁적인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특히 광주 학생 운동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일제의 교묘한 탄압과 사회주의 계열의 투쟁 노선의 변개로,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해에는 해산되었다.

또한, 이를 전후하여 경제적 착취의 가중으로 몰락하게 된 농민과 노동자 들은 소작 쟁의, 노동 쟁의 등의 농민 노동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은 그 기본 성격이 농민 노동 운동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민족 운동으로서의 측면이 컸기 때문에, 반일 반제 운동을 촉진하였다.

이 밖에도, 국내외에서 폭력 수단에 의한 독립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김원봉 등의 의열단(義烈團)과, 김구 등의 애국단(愛國團)의 활동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들에 의한 제국주의자 암살 사건과 식민지 통치 기관 투탄 사건이 수없이 결행되어 일제 군경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 중에도 나석주가 농민의 수탈 기관인 동양 척식 회사에 폭탄을 던진 것을 비롯하여,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죽이려던 일과, 윤봉길의 상하이 훙코우 공원 의거는, 국내외에 큰 감명을 주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