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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종말

농민의 몰락은 사회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시민군의 충원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군사 문제가 되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호민관이 된 그락쿠스 형제는 권력층에 의하여 점유된 공유지를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영 농민을 육성함으로써 사회 및 군사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원로원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를 계기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지배층인 벌족파와 이에 대항하는 평민파의 갈등이 날로 심해졌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무산 시민의 지원병을 받아들이게 되어 군대의 충원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으나, 직업 군인으로 된 이들이 그 지휘관에 의탁하여 사병화함으로써 군대를 배경으로 하는 강력한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 벌족파와 평민파의 싸움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의 실력 앞에 원로원이 무력해져서 그들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됨으로써 기원전 60년에는 삼두 정치가 성립하였다. 이것은 평민파의 케사르와 대부호인 크랏수스 및 서 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와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진 폼페이우스의 세 실력자의 제휴로 이루어졌다.

케사르는 갈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켈트 족을 진압하고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이를 질시하여 원로원과 손잡은 폼페이우스를 타도하여 독재 권력을 수립하고, 빈민 문제의 처리, 속주 통치의 개선 등의 치적을 올렸으나, 전제 군주제를 꾀한다 하여 공화제의 전통을 지키려는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되었다(기원전 44). 그 뒤,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제2차 삼두 정치를 시작하였으나, 결국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탁한 안토니우스와 대결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로마의 패권을 건 악티움 해전(기원전 31)에서 안토니우스를 대파하여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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