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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체제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후의 평화 수립의 원칙으로서 ‘14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비밀 외교의 금지, 공해에서의 항해의 자유, 경제적 장벽의 제거, 군비 축소, 민족 자결주의, 국제 기구의 창설 등이었다. 이러한 원칙은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인 동시에 자유로운 세계 평화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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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대통령
윌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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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19년 1월부터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모인 연합국 대표들은 반드시 윌슨의 이상 주의적인 원칙만을 따르지는 않았다. 강화 회의를 지배한 것은 오히려 전승국의 현실적인 이해 관계와 패전국에 대한 철저한 응징의 방침이었다.

강화 조약은 패전국과 개별적으로 맺어졌는데,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6월에 독일과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하고, 영국, 프랑스, 일본이 이를 나누어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은 알사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는 등 국내 영토도 많이 삭감되고, 군비와 무기 생산이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막대한 배상금까지 부담하게 되었다.

다른 패전국과의 강화 조약에 의하여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되어 새로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하고, 세르비아는 주변의 영토를 얻어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투르크 제국 또한 붕괴하여 아프리카 및 서남 아시아 지역의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폴란드는 옛 영토를 회복하여 독립을 달성하고, 러시아에 속하여 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두아니아가 각각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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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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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에서 생겨 난 베르사이유 체제에 대하여 그것이 독일에 너무 가혹하였으며, 많은 신생 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분쟁의 씨를 뿌리고, 나아가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먼 원인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비판이지만, 베르사이유 체제를 만들어 낸 연합국이 그것을 지켜 나갈 확고한 의지를 가지지 않고 이를 위한 협동적인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점에도 문제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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