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3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세계사(3차)
  • Ⅵ. 현대 세계와 우리
  • 1. 현대 세계의 시련
  • (3) 전체주의와 제2차 세계 대전
  •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략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략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국제 연맹의 무력함이나 유럽 열강의 방관적 태도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략자들을 크게 고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식민지를 요구하고 있던 뭇솔리니는 1935년 이디오피아를 침공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국제 연맹은 형식적인 경제적 제재를 가하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다음해 이디오피아를 정복한 뭇솔리니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독일에 접근하여 베를린-로마 추축을 결성하고, 이 추축은 다시 일본까지 연장되어 동서의 침략 국가들이 깊은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다(1937).

한편, 1936년 에스파니아에서 프랑코 장군이 영도하는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뭇솔리니와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프랑코의 반란을 지원하는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무간섭주의를 내걸고 공화 정부가 쓰러지는 것을 방관하여, 마침내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1939).

1933년에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곧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재군비에 전력을 기울여 단시일 내에 기계화된 정예 부대와 강력한 공군을 가지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뒤 같은 해 9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에 놀란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 및 뭇솔리니와 뮌헨 회담을 열고, 독일이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반년 후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잇달아 폴란드에 대하여 영토의 일부를 요구하였다.

확대보기
뮌헨 회담 후 귀국한 영국 수상
뮌헨 회담 후 귀국한 영국 수상
팝업창 닫기

유화 정책을 계속하여 오던 영국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군비를 확장하고,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어 독일의 침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1939년 8월 그 동안 원수처럼 대하던 소련과 갑자기 불가침 조약을 맺은 히틀러는 9월 1일을 기하여 그의 기계화 부대에 폴란드 진격의 명령을 내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20년 만에 다시 세계 대전이 터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