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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사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선사 시대의 사회와 문화

민족의 기원

어느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나, 모든 종족은 인근의 종족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을 형성해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선사 시대에 여러 민족이 문화의 꽃을 피웠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계에 속하는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의 문화를 이룩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요서,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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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의 문화권
선사 시대의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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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문화

우리 나라의 구석기 문화는 약 50만 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웅기 굴포리, 공주 석장리, 상원 검은모루, 제원 점말 동굴1) 제원의 점말 동굴에서는 중석기 시대 사람의 얼굴을 새긴 코뿔소의 뼈도 나왔다., 청원 두루봉 동굴, 연천 전곡리2) 종래 구석기 문화는 인도의 동쪽(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에서 발달한 찍개 문화와 그 서쪽(인도, 유럽, 아프리카, 중동)에서 발달한 주먹도끼 문화로 대별되고 있다. 전곡리의 유물에서도 주먹도끼 전통의 석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등은 구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도, 여러 지방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로 보아,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공주 석장리의 유적은 전기 구석기에서 후기 구석기까지 계속된 유적으로, 여기에서는 웅기 굴포리의 유적과 함께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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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의 유물
구석기 시대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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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의 구석기 시대 유적들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구석기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신석기 문화

신석기 문화는 약 6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토기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웅기, 만포진, 부산 동삼동 등지에서 출토된 원시 무늬 없는 토기〔原始無文土器〕와 동삼동에서 출토된 덧띠 무늬 토기〔隆起文土器〕3)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에서는 빗살 무늬 토기보다 시대가 앞서는 두 가지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하나는 도토리 모양으로 밑이 둥근 토기인 원시 무늬 없는 토기이며, 다른 하나는 토기 표면에 진흙을 더덕더덕 칠한 듯한, 또는 갈짓자〔之〕형의 덧띠를 돌린 주발 모양의 밑이 둥근 덧띠 무늬〔圓底隆起文〕 토기이다.는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랜 토기로 알려져 있다. 이 무늬 없는 토기와 덧띠 무늬 토기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이 빗살 무늬 토기〔櫛文土器〕4) 빗살 무늬 토기의 서북방 전래설에 대하여 ① 시베리아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 무늬 토기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늬 형태와 그릇 모양이 서로 다르고, ② 그 연대가 시베리아의 것보다 1000년 이상 앞서기 때문에 반대하는 학설도 있다.이다. 빗살 무늬 토기를 만들어 쓰던 사람들은 시베리아, 몽고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각지에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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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 무늬 토기
빗살 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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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 무늬 토기를 만들어 쓰던 사람들은, 초기에는 주로 어로와 수렵 생활을 하였으나, 점차로 농경법을 알게 되어 조, 피, 수수 등을 재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정착 생활에 들어가게 되어 생활이 안정되었으며, 인구도 증가하였다. 석기와 골각기, 돌그물추, 돌화살촉 등이 이들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들은 원형 또는 사각형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웅기의 조개더미에서 발굴된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온돌과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 또, 이들은 직조 기술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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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집터
신석기 시대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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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의 산업은 농경, 어로, 수렵, 베짜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당시의 기술 수준은 낮은 상태였다. 이 시대 사회에서는 씨족 사회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씨족마다 생활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었으나, 혼인은 족외혼을 따랐다.

한편,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 환경으로부터 많은 생활의 제약을 받고 있었으므로, 자연을 우리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애니미즘이 생기게 되었고, 자기 씨족의 기원을 동물이나 식물과 연결시키는 토테미즘도 생기게 되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생산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산신, 바다신, 바람신, 비신 등 기후를 맡은 신에 달렸다고 믿었다.

웅기의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무덤을 보면, 인골이 모두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으며, 음식을 담았던 그릇이 머리 곁에 놓여 있고, 돌화살촉 한 묶음도 함께 매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태양을 숭배하였다는 것과 또 죽은 뒤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각 씨족들은 시조신이 자기 씨족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믿어 시조신을 모시기도 하였다.

청동기 문화와 농경 생활

빗살 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 시대를 거쳐 우리 조상들은 청동기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 때는 무늬 없는 토기를 사용하였고, 여러 가지 모양의 돌도끼, 돌창, 반달 모양의 돌칼 등 석기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썼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기원전 10세기경 북쪽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이 만든 초기의 청동검5) 남만주의 요녕(遼寧) 지방에서 발견된 동검으로, 초기의 비파형 청동검이라 부르기도 하며, 만주식 청동검 또는 부여식 동검이라고도 부른다. 한국 청동검의 원조이다. 남만주 일대를 비롯하여 개천, 평양, 춘천, 고흥, 부여, 무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은 뒤에 세형 청동검으로 모양이 바뀌었는데, 이러한 청동검 외에 청동 도끼나 그 밖의 장식품, 세문경(細文鏡), 방울 달린 청동기 등이 우리 나라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는 아연이 함유된 것도 있는 점과 장식으로 스키토 시베리언 계통의 동물 문양을 즐겨 쓴 점으로 보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보다는 북방 계통의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인류는 생활 무대를 구릉지나 산간으로 옮기면서 집단적인 취락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집터〔住居址〕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지역적인 생활 구역이 점차 읍락(邑落)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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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집터
청동기 시대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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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에는 농경 기술이 보다 발달하여 돌보습이나 돌괭이, 나무로 만든 쟁기로 밭갈이를 하고, 조, 피, 수수, 기장, 보리, 콩 등을 재배하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미 벼농사도 짓고 있었다.6) 김해의 조개더미 외에도 여주군 흔암리와 부여군 송국리에서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고, 부안군 소산리, 토산리, 반곡리와 부산 아치섬에서 볍씨 자국이 있는 토기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신석기 시대보다 농업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냥과 고기잡이도 아울러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족장들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칼과 창으로 무장한 부족들은 이웃 부족들을 복속시켜 공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때, 우세한 부족들은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고 믿는 선민 사상을 가지고 거대한 고인돌이나 적석총, 석관묘를 만들고, 선돌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청동기 문화를 건설한 무늬 없는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앞선 신석기 시대의 문화와 전통을 흡수하면서, 북방, 서방, 남방의 문화까지 포섭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와 같이 앞선 농경 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한편, 신석기 시대 이래로 우리 나라의 선사 문화는 일본에 전해져, 그 곳의 선사 문화 성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7) 구석기 시대에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우리의 문화가 그대로 일본으로 전해졌다. 신석기 시대에도 빗살 무늬 토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죠몽 토기〔繩文土器〕와 연결되고 있으며, 야요이 문화〔彌生文化〕의 벼농사나 고분 문화의 금은 장식도 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크게 발달하였다. 그 밖에도 유구 석부, 세문경을 받아들여 변형시켰으며, 고인돌이나 분묘도 우리의 것을 전수받아 만들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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