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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기 문화와 사회의 발전

철기 문화의 보급

고조선이 망한 이후 철기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들이 성립되었다. 북쪽에서는 부여, 고구려, 동예 및 옥저가 일어났고, 남쪽의 삼한에도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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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여러 나라
초기의 여러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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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의 사용은 생활의 모습을 여러 모로 변화시켰다. 특히, 철제 농기구에 의한 농경 방법이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급격히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새로운 경제 기반 위에서 목축이 성하였다. 한편, 어로 활동도 활발하여 양산, 김해, 웅천 등지에 조개더미를 남겼다. 또, 부족들 간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여러 계통의 문화가 융합되어 가면서 장차 삼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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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농기구
철제 농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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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만주의 송화강 유역에 자리잡은 부여는 고조선 다음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고구려나 백제도 여기에서 갈라져 나왔다.

부여는 반농 반목(半農半牧)의 경제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오랜 역사에 비해 큰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특산물로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으며, 중국에 수출하였다.

부여의 관리로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그리고, 제가들은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중앙과 합하여 5부제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부여가 원래 5부족이 연맹하여 일어났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몇 개의 부족이 연맹하여 성립된 나라에서는, 각 부족장들이 각기 따로 관리를 두고 자기 지역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강한 부족장이 그 연맹의 대표로서 그 나라를 영도하였으나, 다른 부족들과 그 지방을 직접 지배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왕이 죽으면 여러 사람을 함께 순장하였다.

달력은 은력(殷曆)을 사용하였으며, 정월(현재의 12월에 해당)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고구려

졸본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뒤에 통구로 옮겨 오면서 강대해졌다. 통구 지방은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외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외적의 침략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지리적 잇점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일찍부터 문화를 수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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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터
국내성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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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초 태조왕 때에는 고대 왕국의 기반이 성립되어 만주 지방에 그 세력을 넓혀 갔고, 동으로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였으며, 낙랑군을 자주 공격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이렇게 발전하는 과정에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배 계층은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를 가지고 피정복민으로부터 획득한 곡식을 저장하였다. 이들의 지배를 받는 일반 민중과 노비는 농경과 목축 등의 생산에 종사하였다.

고구려의 관리로는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 사자, 조의, 선인 등이 있었으며, 각 부족장들도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들을 거느렸다.

한편, 고구려에는 데릴사위 풍속이 있었으며, 해마다 추수 뒤인 10월에는 시조신을 모시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큰 잔치를 하였다. 이 제전은 그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옥저와 동예

옥저는 지금의 함흥 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로서, 각 부락에는 족장들이 있어서 자기의 부락을 다스렸다. 그러나, 아직 이들을 통솔할 수 있는 보다 큰 정치 세력은 성립되지 못하였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로, 언어는 대개 고구려와 같았으나, 그 풍속에는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 풍속과 반대로 민며느리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 안에 넣는 풍속이 있었다.

옥저는 해안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5곡이 잘 되었다.

초기의 고구려는 바다에 접해 있지 못한 내륙 국가였으나, 옥저를 점령하면서부터 소금, 어물 등 해산물을 공납으로 받아 가게 되었다.

한편, 동예의 여러 부락들은 영흥, 덕원, 안변 등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수렵 등으로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산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고 삼베도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果下馬, 조랑말), 반어피(해표피) 등이 있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이들은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한편, 족외혼율이 엄하였으며, 각 씨족마다 생활권이 정해져 있어서 다른 씨족의 경계 안에서는 수렵, 어로, 경작을 하지 못하였다. 동예는, 문화면에서는 고대 왕국 전단계까지 발달하였으나, 씨족 사회의 전통은 그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삼한

한강 유역 이남에도 일찍부터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는데,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들과 연합하여 마한, 진한, 변한에 여러 나라를 일으켰다.

이 중에서 우리 나라 남부의 서쪽에 위치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그 중의 하나인 목지국이 남방의 영도 세력이 되었다. 마한에는 많은 국가가 있었고,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과 진한 남쪽에 있는 변한 지역에도 여러 국가가 있었다.

당시 민간의 가옥은 손쉽게 지을 수 있는 움집이나 귀틀집이었으나, 점차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한 오늘날의 초가와 비슷한 집이 세워졌다.

농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농경 기술이 들어왔다. 밭갈이에 가축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고, 수전 경작을 위하여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상주의 공검지, 의성의 대제지 등 많은 저수지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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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벽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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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사회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의 수릿날과, 가을 곡식을 거두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계절제는 오늘날까지 5월 단오와 10월 상달 고사의 풍속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농지를 개간하여 소유하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물의 관리권을 가지게 된 신지, 견지라고 불리는 대족장은 물론, 그보다 작은 읍차, 부례라는 소족장들도 그 지배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커지자, 그전부터 있던 제사장인 천군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제정이 분리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족장들의 무덤인 적석총이나 석관묘는 내부의 시설과 함께 그 봉토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고, 커다란 독에 시체를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의 매장 방식도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도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 지역은 신성 지역으로서, 죄인이라도 이 곳으로 도망하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쇠붙이를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하였고, 낙랑, 대방과 일본 지역에까지도 수출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 문화의 급속한 보급은 삼한 사회에 변동을 가져왔다. 즉,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의 세력이 커지면서 마한 지역을 아울렀고, 지금의 낙동강 유역에서는 6가야가,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고대 왕국이 성립될 기반을 닦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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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시대의 철기
삼한 시대의 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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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농업도 크게 발전하여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예술적인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아직 원시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들의 예술은 종교와 밀착되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연모를 보면, 그 모양이나 장식에 있어 미를 나타내고자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예술품으로는 바위면을 쪼아서 새긴 암각화가 유명하다. 고령에서 발견된 암각화에는 원, 삼각형 등의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同心圓)은 태양을 상징하는 듯하며, 다른 농업 사회에서의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를 비는 뜻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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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암각화
고령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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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보다 앞선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울주의 암각화에는 고래, 거북, 사슴, 호랑이, 토끼 등과, 사냥하는 장면과 배를 타고 고기잡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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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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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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