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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의 발전
  •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 (1) 통일 신라의 발전

(1) 통일 신라의 발전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

여⋅제 양국이 망한 뒤, 당이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자, 신라는 나⋅당 전쟁을 통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 내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 때 요하 지역과 장백 산맥 이북 지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뒤 우리 민족의 영역은 한반도로 국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완전하게 삼국 통일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하나의 통일 정부를 세워 같은 제도 아래에서 민족이 뭉치게 된 것은,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뜻깊은 일이었다.

그리고, 여⋅제 양국의 지배 계층이 무너짐으로써 지배 계층의 수가 적어지고, 옛 신라의 영역보다 3배나 확장된 지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국가 경제력이 그만큼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대된 정치⋅경제적 토대 위에서 문화의 기반도 단일한 것으로 정리되어, 민족 문화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중앙 정치 조직의 정비

삼국을 통일한 신라 왕실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므로, 옛 귀족 회의의 의장격이던 상대등의 세력보다 왕명에 의하여 실제 정무를 처리하는 집사부 시중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한편, 옛 고구려와 백제의 관리들에게는 그들의 신분에 따라 알맞은 관직을 주어, 신라 지배 체제 안으로 포섭하였다.

통일 전부터 사회의 발전에 맞추어 여러 관청을 차차 만들어 병부, 창부, 예부, 위화부 등을 두었고, 통일 후 신문왕 때에 와서는 예작부 등을 두어 집사부(성) 등 14개의 관청으로 정비하였다.

이와 아울러, 왕권의 강화와 중앙 정치 체제의 정비에 따라 유교 정치 이념이 필요하게 되어,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세우고 한학 교육에 힘썼다.

지방 행정 조직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한편, 지방 통치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소백 산맥 외곽 지대인 지금의 충주, 원주, 청주, 남원 등 네 곳과 김해에 소경을 두어 5소경 제도를 마련하여, 그 장관을 사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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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5소경
9주 5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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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장관을 도독이라 하였는데, 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고, 군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호족들을 인질로 중앙에 와 있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두었는데, 이것은 후일 고려 시대 기인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군사 조직

통일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신라는, 고구려계, 백제계, 말갈계의 군대까지 통합하여, 신라 국방군의 중추 세력인 9서당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 밖에 지방 군관구의 성격을 가진 10개의 정을 9주의 주요 지역에 배치하였다. 또, 수도와 소경을 방위하기 위해 통일 전부터 있던 시위부 외에 몇 개의 특수 부대를 두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비된 군사 조직은 신라 말기에 이르러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면서 점차 문란해졌다.

경제 생활의 진전

통일 후에는 노동력과 생산 자원이 보다 철저하게 편제되어 관리되었다. 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를 보면, 남녀별, 연령별의 정확한 인구와 소, 말, 뽕나무, 호도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마다 한 번씩 통계를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민이나 부곡, 향, 소의 천민 집단 및 노비의 노동력이 철저하게 동원됨으로써 경제 생활은 귀족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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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
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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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녹읍을 가지고, 그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하였다. 그리고, 섬이나 산간에 목장을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고리대업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였고, 그 대신에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주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제가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 토지가 날로 증가하여 국가 경제는 위태롭게 되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경주에 호화 주택과 별장을 짓고 향락 생활을 즐기게 되어, 점차 전날의 굳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농업이나 목축업뿐만 아니라 수공업도 성하여, 견직물, 마직물의 방직 기술과 금은 세공, 나전 칠기 등의 공예품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다.

한편, 상업도 발달하여 경주에는 통일 전에 설치된 동시 외에 서시, 남시가 설치되어 크게 번영하였다.

해외 무역의 발달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당 및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성하였다. 당시 대당 수출품은 견직물과 고운 베, 그리고 해표피, 삼, 금은 세공품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과 책 및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들이었다. 이 때, 당의 산물뿐 아니라 서역의 상품들도 수입되었다.

당으로 가는 해로는 지금의 전남 영암에서 상하이 방면으로 가는 길과, 경기도 남양만에서 산뚱 반도로 가는 길이 있었다. 한편, 경주에서 가까운 울산항이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그리고, 신라인이 자주 당에 드나들면서 당의 산뚱 반도와 양쯔 강 하류 일대에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이 생기게 되었고, 신라소와 신라원이 세워졌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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