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4차(상)
  • Ⅱ. 중세 사회의 발전
  • 1. 고려의 건국과 귀족 사회의 성립
  • (3)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3)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

거란은 중국의 5대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는데,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이 땅을 회복하려 하였으므로, 거란은 송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란은 송과 친교를 맺고 북진 정책을 표방하는 고려를 항상 경계하였으며, 송은 고려와 제휴하여 거란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 발해가 망한 뒤에 그 유민들은 일찌기 고구려가 일어났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을 세우고, 동진하는 거란과 북진하는 고려 사이에서 자체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송과 자주 왕래하였으므로, 거란은 한층 더 자극을 받았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거란은 국호를 요라 고치고, 먼저 정안국을 토벌한 다음,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제1차 침입 때에는, 서희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요와의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자, 요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왔다. 이 제2차 침입에서는 방어하던 강조가 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귀주에서 이를 대파하였다.

그 뒤, 소배압을 장수로 한 10만 거란군의 제3차 침입도 개경 근방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협공을 받아 후퇴하는 것을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섬멸하였다.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1019).

거란은 그 뒤에도 자주 침입을 시도하여 국경 방면에서 충돌이 계속되었으나, 고려는 그 때마다 이를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거란은 고려에 다시 침입할 수도 없었고, 또 고려가 배후에 있는 한, 송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전란의 영향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고려, 송, 요 삼국 간에 평화가 유지된 것은, 고려의 힘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는 수도만 함락시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기동력이 강한 기병으로 고려에 깊숙이 쳐들어왔으나, 각처에서 성곽을 근거로 한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없었다. 더우기, 귀주 대첩과 같이 거란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할 수 있는 고려의 군사력이 바탕이 되어, 그 뒤부터 거란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고려는 국방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았다. 한편, 덕종 때에는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으로서, 중국의 만리 장성과 같이 북방의 침략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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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와 천리 장성
강동 6주와 천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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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나성
개경의 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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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과의 관계

숙종 때 만주 하얼삔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간도 지방을 손에 넣었다. 이어서, 그들은 다시 함흥 부근까지 손을 뻗쳐, 고려에 복속하였던 여진족을 아우르고, 정주에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기병인 여진족의 군대를 보병만으로는 방어하기 곤란하였으므로, 숙종은 신기군이란 기병 부대를 조직하고, 승병의 항마군, 보병의 신보군을 편성하였다. 그 뒤 예종 때, 윤관이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하여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동북 일대에 9성을 쌓았다. 이리하여, 고려의 영토는 북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이 계속 침입하였으므로 9성을 수비하기가 곤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9성의 환부를 애원해 왔고, 또 서북에는 거란족의 세력이 있었으므로, 동북의 여진족 토벌에만 전 국력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9성을 쌓은 지 1년 만에 이를 여진족에게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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