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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왜란과 호란
  • (1) 왜란

(1) 왜란

왜란 전의 정세

16세기에 들어서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점차 약화되어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비변사를 설치하고,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역설했지만, 양반 관료들은 안일 속에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100여 년 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수습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일본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세력가들을 완전히 장악할 만한 정치적 권력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토요토미는 그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고자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준비하였다. 그는 먼저 정탐군을 보내어 조선의 산천과 정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수집하는 한편, 서양의 총포술을 받아들여 무기를 개량하고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에 반하여, 우리 나라는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국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데다가, 장기간의 평화가 계속되었으므로 외세의 침략에 대한 준비가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왜군의 침입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불의에 대군을 맞은 부산의 군민들은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장렬하게 싸웠으나, 성은 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부산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성으로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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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 전투도
부산성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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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군민들도 부사 송상현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동래성을 점령한 왜군은 세 길로 나뉘어 서울로 향하였다. 이에, 신입이 충주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역시 숫적으로 우세한 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이어서 북상을 계속하였다.

이에, 선조는 왕자와 대신들을 데리고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왜군은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전쟁 초기에는 왜군의 전력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육전에서는 조선이 극히 불리하였다.

수군의 승리

왜군의 침략 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이 북상하는 데 따라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 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이순신이었다. 그는 1년 전에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저장해 두었다.

이순신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5월 초에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여수를 떠나 경상도 해안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먼저 옥포에서 적선을 무찔러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전라 우수영 및 경상 우수영의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두 차례 출정에서의 승리로 수군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연안 백성들도 우리 수군의 전투를 여러 면으로 지원하면서 전의를 돋우었다. 따라서,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왜군들은 해전에서의 이와 같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모든 함선들을 다시 모아 총공격을 개시하고, 육지에서도 전라도 지방을 공격하게 하여 우리 수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수군 함대는 적의 이러한 계획을 미리 간파하여, 육지의 백성들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적함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으니, 이것이 한산 대첩이다.

그 후, 우리 수군은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승리로 우리 함대는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안전하게 지키게 되어, 적의 육군의 작전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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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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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이렇게 승리한 이유는, 정연한 수군의 편제와 지휘관의 뛰어난 전략을 바탕으로 하여,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의 우수한 성능이 왜군 함대를 압도하였기 때문이다.

의병의 항쟁

해전에서의 잇단 승리와 때를 같이하여 육전의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각 계층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 방위를 위해 일어선 것이다.

이 자발적인 무장 부대들은 나라를 위한 충의를 내걸고 싸웠기 때문에 의병이라고 부른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리, 유학자,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고, 신앙과 학문도 같지 않았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적 정열에는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향민 스스로가 떠맡아 온 전통은 이미 예부터 변함 없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의병 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또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가지고 싸웠으므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적은 희생으로써도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편, 의병들은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가진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되도록 정면 충돌을 피하고, 뛰어난 기동력과 매복, 기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뛰어난 유격 전술은, 큰 병력을 가진 이민족과의 오랜 전투 경험에서 터득된 전투 기술이었다.

곽재우, 조헌 등 크고 작은 의병 부대의 활약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의병들의 빛나는 전과들은 수군의 승리와 더불어 국민들 가슴 속에 자신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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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의 항쟁
임진왜란 때의 의병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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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의총
700 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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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를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관군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작전이 보다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우리의 육군과 수군은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모든 전선에서 반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정세의 전환

육해의 모든 전선에서 조선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왜군에 대한 반격을 강화해 가던 중, 명의 이여송이 거느린 5만 명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과 합세하였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정명 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명을 침략할 것을 공언했기 때문에, 명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쟁을 주시하다가 원병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명 연합군은 왜적에게 점령당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쪽으로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였다.

이에, 왜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완화시키고, 자신들의 전열을 다시 가다듬기 위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또, 명도 평화적으로 왜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담판을 시작하였으나, 서로의 이익을 크게 내세웠으므로 3년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왜군의 재침

일본은 3년간의 휴전 기간 동안 전열을 가다듬어 재차 침입하였다(1597).

그 사이 우리 나라도 군비를 새로이 갖추었다. 즉,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의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삼수, 즉 창검을 가진 살수와 활을 쏘는 사수, 그리고 총과 대포를 가진 포수로 나누어 훈련시킴으로써 군대의 기능을 전문적으로 강화하였다.

한편, 수군에 있어서도 이순신으로 하여금 3도 수군의 지휘를 맡게 하여 지휘 체계를 강화하고, 군함, 무기, 식량 등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파면되고 원균이 그 뒤를 잇자, 왜군은 이러한 지휘권의 변경을 틈타 제해권을 빼앗기 위하여 총공격을 해 왔다. 이에, 원균은 2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부산 쪽으로 진격하다가 칠천도와 고성 앞바다에서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적은 육지를 마구 침범하여, 9월에는 충청도 지방에까지 다시 북상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이 명의 원군과 협동하여 직산에서 적의 북상을 막고 남쪽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다시 3도 수군 통제사에 복귀되어 300여 척의 큰 함대를 끌고 덤벼드는 왜군을 명량으로 유도하여 일대 반격을 가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또 다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점차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수군은 도망치던 왜선 수백 척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마지막으로 7년간에 걸친 전란은 끝나게 되었다(1598).

왜란의 영향

왜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민족이 지닌 잠재적 역량이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즉, 관군 차원에서의 국방 능력은 우리가 일본에 뒤졌으나, 전 국민적 차원에서의 국방 능력은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였다. 국민들은 신분의 귀천이나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문화적인 우월감에 가득 차 있어서, 자발적인 전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력은 국방 능력으로 크게 작용하여 왜군을 격퇴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진전됨에 따라 각 지방의 자연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융통성 있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익혔으며, 대포와 함선 제조 기술은 단연 일본을 능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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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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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에서의 승리는 몽고와의 항쟁 이후 가장 커다란 국난의 극복으로서,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고 민족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한편, 왜란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크게 바뀌었다.

조선과 명이 전쟁에 지친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후진국이던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등의 문화재와 인재를 약탈해 갔으며, 조선의 성리학이 전해져 일본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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