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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1.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대외 관계
  • (3) 산업의 발달

(3) 산업의 발달

농업 기술의 발전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된 농업은 17세기 후반 이후로 급속히 복구, 발전되었다. 왜란 직후의 토지 대장(양안)에 등록된 토지 결 수는 54만 결에 지나지 않았으나, 18세기 초에는 약 140만 결로 늘었다. 그러나, 이 밖에 토지 대장에서 누락된 토지(은결)가 상당수 있어서 실제의 토지 결수는 양안의 수치를 훨씬 능가하였다.

경지 면적의 확장과 함께 수리 시설도 크게 개선되었다. 제언사가 설치되고, 제언절목을 반포하여 수리 시설의 개인 독점을 금지하는 동시에, 많은 제언을 수리 또는 신축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말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수천 개소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 김제의 백골제,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등은 큰 저수지로 꼽힌다.

수리 시설의 확장으로 수전 농업을 발전시켜 밭농사를 논농사로 바꾸어 갔고,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이 보급되었다. 이앙법으로 풀뽑기에 필요한 노동력이 절감되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늘었을 뿐 아니라, 모내기 이전에 보리를 심을 수가 있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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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는 모습(민화)
모내는 모습(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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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에 있어서도, 밭고랑과 밭이랑을 만들어 밭고랑에 곡식을 심는 견종법(畎種法)이 널리 보급되어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와 같이, 이앙법과 견종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됨으로써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지 면적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영하는 광작(廣作)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들은, 구태여 병작을 하지 않고도 고공이나 노비를 부려서 광작을 하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가난한 농민들은 병작지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져, 농토를 떠나 노동자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이앙법과 광작의 보급은 농촌 사회 내부의 분화를 촉진하여, 점차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18세기에는 상품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업 분야에서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인삼, 담배는 가장 인기 있는 작물로서,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지에서 재배되었고, 담배는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전래된 후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였으며, 그 밖에 피마자, 목화, 약재, 고추, 호박, 과실 등도 인기 있는 상업 작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기근에 대비한 구황 작물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고구마, 감자가 널리 재배되었다. 고구마는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오고, 감자는 청에서 종자를 들여 와 보급하였다.

농업의 발달을 위해 많은 농서가 출간되었다. 효종 때 신숙은 농사직설, 금양잡록, 기타 농서들을 묶어 농가집성을 편찬하였다. 특히, 강필리, 김장순, 서유구 등은 고구마 재배법을 깊이 연구하여 감저보, 감저신보, 종저보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농업과 의약에 관한 서적이 많이 편찬되어,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민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병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地代)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지주와 작인이 수확을 반씩 나누는 타조법(打租法)은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관행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전세와 종자, 그리고 농기구를 작인이 부담하게 되어, 다른 지방의 작인들보다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

또, 일부 지방에서는 풍흉에 관계 없이 해마다 일정한 양을 지대로 바치는 도조법(賭租法)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도조법은 대개 수확량의 약 3분의 1을 지주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타조법보다 작인에게 유리하였다. 도조법은 도지권 소유자에게만 적용되었다. 도지권은 작인이 토지를 개간했거나 제방을 쌓거나 매수하였을 때에 성립하는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지권을 가진 작인은 그 토지를 매매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도지권을 가진 농민은 지주에 대하여 보다 자유로운 관계를 가지면서 농업 경영을 할 수 있었고, 광작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 수공업의 발달

조선 초기 관장 중심의 관청 수공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였다. 무기, 종이, 활자, 자기, 비단, 유기, 화폐 주조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관청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품질도 매우 우수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2800여 명에 달하던 경공장(京工匠)은 18세기 후반에 약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외공장(外工匠)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 기관에 전속된 장인이 줄어든 대신,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는 납포장(納布匠)은 더욱 늘어서, 18세기 중엽에는 10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공인이나 일반 시장을 상대로 물품을 제조하였다.

국가는 공인에게서 물품을 사들이거나, 장인이 바치는 세(포)로 개인 수공업자를 고용하여 물품을 제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인들의 자본을 끌어들여 수공업 경영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이 경우, 상인은 원료와 공전을 선대(先貸)해 주고 제조된 물품을 사 들였다.

상인이 물주(物主)로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현상은, 특히 종이, 화폐, 야철, 자기 등의 제조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것은 17~18세기 수공업에 있어서 보편적인 양상이었다.

한편, 수공업자 중에는 독립된 자본으로 스스로 생산,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 수공업자들이 제조하는 물품은 주로 그릇류와 일용품, 그리고 무기, 화약, 농기구, 모자, 장도, 솥, 놋그릇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 안성과 납청(평안도 정주)의 놋그릇, 통영의 칠기, 해주의 먹, 전주의 부채, 나주의 종이, 영암의 빗 등은 특히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밖에, 여자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하는 마포(베), 저포(모시), 명주, 면포(무명) 등도 그 품질과 기술이 향상되고 크게 발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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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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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의 개발

조선 초기에는 광업을 국가가 경영하여 사적인 광산 경영을 막았으나, 점차 사채(私採)를 허용하면서 세금을 받아 내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광산의 개발이 촉진되었는데, 특히 대청 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나고 조총의 납 탄환〔鉛丸〕 주조가 활발해지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에 가까운 은점(銀店)이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는 농민들이 광산에 너무 모여들어 농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염려하여 공개적인 채취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광산을 개발하면 이득이 많았으므로, 상인들은 금광, 은광을 몰래 개발하여 이른바 잠채(潛採)가 날로 번창하였고, 큰 자본을 모은 이도 생기게 되었다.

금광이나 은광만큼 활기를 띠지는 않았으나, 놋그릇과 무기, 구리돈 주조의 원료로서 동광, 그리고 무기나 농기구의 재료로서 철광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한편, 화약 제조의 원료인 황 광업도 중요시되었다.

자유 상업의 발달

서울의 시전 상인과 공인의 상업 활동이 활기를 띤 것과 때를 같이하여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사상(私商)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상호간에 경쟁이 일어났다. 시전 상인들은 난전을 금압하는 금난전권을 가지고 독점 판매를 하였으나, 정부로서도 사상의 성장을 막을 길이 없어서, 18세기 말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많은 시전 상인들은 사상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난전 상인들도 육의전에서 취급하는 상품이 아닌 것은 자유로이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서울의 상가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이현(동대문 안), 칠패(남대문 밖), 종루(종로 근방)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한편, 시전 상인이 사상의 침식을 크게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인들의 활동은 사상의 침해를 별로 받지 않고 번창하였다. 공인은 대개 시전 상인(시인)이나 경주인, 장인 중에서 되었는데, 그들은 선혜청이나 상평청, 진휼청, 호조 등에서 공가(貢價)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품하였다. 공인은 국가에 대한 국역으로서 세금을 바쳤다.

사상들은 난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17세기 후반부터는 서울의 변두리와 지방에서도 한강을 중심으로 자본을 모은, 이른바 경강 상인(京江商人)의 활약이 컸다. 즉, 그들은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또, 개성의 송상들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시전 상인이나 난전 상인, 그리고 공인이나 지방 상인 할 것 없이, 조선 후기의 큰 상인들은 독점적인 도매업의 방법을 써서 물품을 염가로 매점하여 고가로 판매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흔히 도고(都賈)라고 불렀다.

도고의 성장은 농업에 있어서 광작의 유행과 비교되는 새로운 경제 현상으로서, 후자가 농민의 계층 분화를 촉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전자는 상인의 계층 분화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장시도 조선 후기에 들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의 장시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등을 교환하였고, 보부상(褓負商)이라는 행상단이 먼 지방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팔았으며, 상품과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일부 장시는 점차 상설 시장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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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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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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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러한 장시에서는 대규모 교역이 행해져, 도매업과 위탁 판매업, 창고업, 운송업, 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나 여각 등이 나타났고, 거래를 붙이는 거간까지 생겨났다. 객주나 여각은 자금의 대부와 어음 발행, 예금 등의 은행업도 겸하여, 지방 상업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또,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그 중에서 일부는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갔으니, 이 중에서 강경, 전주, 대구, 안동 등이 유명하였다. 그리고, 도로도 많이 개설되었으며, 수상 운수도 발달하게 되었다.

대외 무역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발해졌다.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한 공적인 무역과 사적인 무역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청에서 들여 오는 물품은 비단, 모자, 약재, 말,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을 비롯하여 각종 가죽,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대일 무역도 활발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삼, 쌀, 무명 등을 팔고, 또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 주는 중계 무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는데, 이 중에서 은은 다시 청에 수출함으로써 중간 이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의주의 만상과 개성의 송상, 그리고 동래의 내상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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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역지와 상업 활동
조선 후기의 무역지와 상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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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입품 중에는 사치품이 많았고, 수출품 중에는 은과 인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국가 재정과 민생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던져 주기도 하였다.

화폐 경제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화폐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되어, 인조 때에 동전이 주조되고 숙종 때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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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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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도 교환 수단으로서 대종을 이룬 것은 은이었으며, 그 밖에 쌀과 포목 등 현물이 화폐처럼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화폐는 보조적 기능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서서 대동미와 기타 세금이 금납화되어 가고, 지대도 화폐로 지불되기 시작하면서, 화폐의 사용이 일차적인 유통 수단이 되었다.

화폐의 보급은 상품 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즉, 상인이나 지주들은 늘어난 재산을 화폐로 바꾸어 저장해 두고, 그 화폐를 대여하여 쉽게 재산을 늘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폐가 많아질수록 화폐는 더욱 퇴장되어 유통 화폐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을 전황(錢荒)이라 한다.

전황 문제는 18세기 중엽 이후로 심각하게 대두되어, 실학자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화폐의 긍정적 기능과 함께 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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