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4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1.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대외 관계
  • (4) 대외 관계

(4) 대외 관계

청과의 관계

호란 이후 조선에서의 청에 대한 적개심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여 북벌 정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정치적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청에서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국력이 신장되고 문물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의 사신 일행은 청에 다녀온 후 기행문이나 국왕에 대한 보고서를 통하여 청의 소식을 전하였고, 각종의 서적을 구입하여 왔다. 그리고, 조선의 학자 가운데는 청을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받아들이자는 실리적 주장을 제기하여 북학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조선에 대하여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명백히 하자는 교섭을 해 왔다. 백두산은 지형적으로 만주와 한반도를 연결시켜 주며, 역사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영봉(靈峰)으로서 민족 정기를 상징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은, 영토적 야심이 커져 백두산 일대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조선과 청 양국이 공동으로 조사하여 경계를 확정하자고 제의하여 왔다. 그리하여, 백두산을 답사하고 산정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되었다1) 정계비는 백두산 산정 동남방 약 4km, 해발 2200m 지점에 세워졌는데, 그 비문에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이라 하여, 서는 압록강, 동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으로 되었다. 훗날 토문강의 위치를 둘러싸고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1712). 이 정계비는 후에 그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 사이에 간도의 귀속 문제에 대한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토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는 조선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도주를 통해 교섭을 허용해 줄 것을 조선에 간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저질렀던 잘못을 탓하면서도, 국초 이래의 교린 정책의 원칙에 맞추어 제한된 범위에서의 교섭을 허용하였다2) 세사미두는 100석,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였다. 쓰시마 도주에게 도서(圖書)를 만들어 주어, 조선에 오는 일본인은 이 도서를 사용한 서계(書契)를 지참하게 했으며, 부산포 이외의 곳에 머무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 조선에 오는 일본인의 지위의 등급에 따라 선박 수와 선원 수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1609, 기유약조).

그리하여, 부산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고, 이 곳에서 일본인들은 쌀, 무명, 인삼 등을 구하여 갔다.

한편, 일본은 조선을 상국이나 문화의 선진국으로 여겨 조선의 사절을 파견해 줄 것을 부탁하여 왔다. 특히 바쿠후 장군직의 계승이나 일본 국내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들은 조선의 사절을 맞이함으로써 정치적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였는데3) 통신사는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모두 12회 파견되었다. 일본에 가면 쓰시마 도주의 안내로 에도까지 갔는데, 일본인들이 정중하게 호위를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통신사의 접대에 막대한 비용을 소요하였으며, 바쿠후 장군들의 가장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그 일행이 5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대우를 하였다. 일본은 통신사 일행을 통하여 선진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려 애썼다. 통신사는 외교 사절만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구실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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