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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갑오경장과 근대 문물의 수용

(5) 갑오경장과 근대 문물의 수용

갑오경장

동학군의 진압에 성공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서두르면서 조선 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측의 개혁 강요에 대하여 정부는 이미 교정청에서 개혁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거절하면서, 개혁 전에 먼저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세력을 몰아 내고, 김홍집 등의 개화파로 새 정부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부문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이 개혁은 초정부적 존재인 군국 기무처라는 회의 기관에 의해 추진되었다.

일본이 의도하는 개혁은 조선 정부와 사회를 일본과 비슷한 근대 자본주의적 체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갑오경장은 조선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군대의 양성이나 군제의 개편 등은 손도 대지 못하는 타율적인 면이 나타났다. 따라서, 갑오경장은 근대적 개혁인데도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갑오경장은, 정치면에서는 청과의 종주(宗主) 관계를 끊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며, 왕실과 정부를 분리하여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고, 의정부 밑에 8아문을 두어 국정을 분담시켰으며,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새로운 관리 임용법을실시하여 신분의 구별없이 인재를 등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국민의 체포와 구금, 재판을 경찰관과 사법관만이 하도록 하였다. 지방은 8도 내에 새로이 23부를 두고, 지방관의 권한도 축소시켜 종래와 같은 사법권, 군사권은 부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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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 때의 정부 조직표
갑오경장 때의 정부 조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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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면에서는 재정을 일원화하였다. 갑신정변 때의 재정을 호조에서 총괄하게 하던 예에 따라 세입, 세출, 조세, 국채, 화폐, 은행 등 재정에 관한 사무를 탁지부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은 본위의 화폐 제도의 채택과 조세의 금납제를 시행하고, 도량형을 개정, 통일하였다.

갑오경장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은, 양반 체제하의 신분 제도를 폐지하는 사회적인 개혁이었다. 양반과 평민의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 광대 등의 천민 신분을 폐지하였으며, 공사 노비의 제도를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하였다. 또,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등 봉건적인 폐습을 타파하려 하였다.

갑오경장은 사회 개혁의 면에서 볼 때 개항을 전후하여 계속 추진되어 온 개화 운동의 연장이었다. 개혁의 정신을 명문화하고자 정치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것이라 할 수 있다.

홍범 14조의 내용은 청과의 절연과, 종실과 외척 등의 정치 관여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입법권의 독립이나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권의 확립과 같은 것은 기약되지 않았다.

홍범 14조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업을 세운다.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왕족과 친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宗室),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5. 의정부(議政府) 및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지 아니한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의 관할에 속한다.

8. 왕실의 경비는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9. 왕실과 관부(官府)의 1년 회계를 예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 기예를 견습시킨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軍制)의 근본을 확립한다.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개혁 추진에 대한 반발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 냈다. 그리고, 청으로부터 요동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고 배상금 2억 냥을 받았다. 이와 같이, 일본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세력을 뻗자, 열강의 아시아 정책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만주로 침투하려던 러시아는, 곧 독일, 프랑스와 제휴하여, 일본에 대하여 동양 평화에 해롭다는 구실을 들어 요동 반도를 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3국 간섭에 맞설 힘이 없는 일본은 부득이 요동 반도를 청에 반환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위신이 떨어졌다.

일본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려던 조선 정부는 이 기회에 배일 친러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갑오경장을 추진하던 박영효 등을 정권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범진, 이윤용, 이완용 등으로 친러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일본 낭인과 군대를 조선 궁궐에 침입시켜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1895), 이어 친러파를 축출한 후, 김홍집, 유길준 등으로 하여금 내각을 다시 조직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 감정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열강도 일본을 크게 비난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수립된 정부는 잠시 중단되었던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강행하였다. 양력의 사용을 비롯하여,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제도의 실시, 연호의 사용, 군제의 개편 등을 단행하고, 단발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과 친일파에 의한 급진적 개혁은 국민의 배일 의식을 크게 고취하였고, 그 결과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근대 문물의 수용

개항 이후 근대 과학 문물과 기술을 도입하여 교통, 통신, 전기, 의료, 건축, 산업 등 각 분야에 새로운 시설을 만들고, 생활 양식도 변모하게 되었다. 더우기, 독립 협회의 활동을 전후해서는 일반 국민의 근대 문명에 대한 각성이 높아져 근대적 시설이 촉진되었다.

일본에 갔던 신사 유람단과 청에 갔던 학생들이 돌아온 후, 정부에서는 박문국, 기기창, 전환국 등 근대 시설을 갖추어, 신문을 발간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화폐를 주조하였다.1) 문호 개방 이후 외국 상품의 침투로 국내 수공업계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근대 과학 문물과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공업 생산을 하려는 움직임이 정부와 민간에서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박문국, 기기창, 전환국 외에 직조국을 두어 직조 공장을, 제지국을 두어 제지 공장을 세웠다. 이 밖에 광무국, 권연국, 양조국, 근대적 양잠업을 시도하는 모범 양잠소 등 근대 공업을 진흥시킬 실업 교육 기관도 설립하여 기술자 양성도 꾀하였다. 민간 자본에 의한 직조 공장, 제사 회사, 사기 공장, 철물 공장 등도 설립되었다. 또, 농업 기술 발전을 위해 농무 목축 시험장과 농상공사의 설치를 비롯하여 새로운 농업 기계류를 도입하고 새로운 농작물의 종묘와 가축도 구입하였다.

한편,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우정국도 다시 운영되었고(1895),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하여 외국과 우편물을 교환하였다.

통신 시설은 청에 의해서 서울-인천 간과 서울-의주 간에 전신선이 가설되었는데, 이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후에 청과의 연락을 신속히 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졌다. 그 뒤, 정부는 일본과 합작하여 서울-부산 선을 가설하고 전보총국을 설치하였으며, 통신원을 두어 통신 사무를 자주적으로 관리하였다. 전화는 처음에 궁중 안에 우선 가설되었고, 이어 서울-인천 간의 시외선이 가설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서울 시내 일반에도 가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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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남자 교환수
한말의 남자 교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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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서울-인천 간의 경인선이 최초로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부설권을 얻은 미국인 모오스(Morse)가 착공하였으나, 일본 회사에 잇권이 전매되어 완공되었다. 그 뒤,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은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연결하여 대륙과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을 부설하였다. 한편,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Colbran)의 합자로 설립된 한성 전기 회사가 전차를 부설하여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한성 전기 회사는 서울에 최초로 전등을 가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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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기공식
경인선 기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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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의료 시설과 기술로는 정부의 지원으로 미국인 선교사 알렌(Allen)으로 하여금 광혜원을 설치하게 한 것이 처음이었고, 지석영은 종두법을 연구, 보급시켜 국민 보건에 공헌하였다. 그 뒤, 정부에서 광제원과 대한 의원 등을 설립하여 신식 의료를 보급하였다. 그리고, 진주, 청주, 함흥 등 전국 10여 곳에 자혜 의원을 세워 의료 시설을 확장하였다. 대한 의원에서는 의학부, 약학부, 산파과, 간호과 등을 부설하여 의료 요원도 양성하였다. 한편, 세브란스 병원도 세워져 의료 교육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건축 부문에서도 서구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뜬 것이었고, 착공한 지 10년 만에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은 르네상스식의 건물이다. 이 밖에, 중세 고딕식인 명동 성당도 이 무렵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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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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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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