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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병의 구국 항전

무력 항일 운동의 시작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무력을 앞세운 민족 저항으로 가장 중요한 줄기를 이룬 것은 의병의 항전이었다. 의병의 항전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에서 비롯되었는데, 본격적인 의병 활동은 러⋅일 전쟁과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한 때부터였다.

의병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 후 보은에서 문석봉이 봉기한 것이 처음이었으나, 단발령 후부터는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천의 이춘영 등에 의하여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충주를 점령한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선산의 허위, 진주의 노응규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장들은 거의 모두 덕망 있는 유학들이어서 민중의 호응을 받았는데, 이들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의 전통을 이어받아 일제를 몰아 내고 조국을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전국 각지로 군사 활동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친일적인 지방 수령을 숙청하고,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9개월 간 지속되었던 의병 활동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국왕의 해산 권고 조칙 등에 따라 점차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계승되어 을사조약 후 다시 불붙게 되었다.

의병 항전의 재연

러⋅일 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적극화되자, 유생과 농민들이 합세하여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두 달 전에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기를 당하자, 무장 항전을 보다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대규모의 조직으로 일본 군경과 격전을 벌이며 항전한 의병장으로는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을 들 수 있다.

민종식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관직을 버리고 고향 정산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홍주에서 활동하던 이세영, 안병찬이 합세하였다. 민종식은 “일본을 토멸하고 5적을 몰살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을 구하여 종묘 사직을 탈 없게 한 후 군신 상하가 태평을 누리게 하겠다.”라고 선언한 후, 홍주성에 진격하여 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민종식은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으로 후일을 기약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도 민종식은 각지의 일본군과 일본인 상가를 공격하면서 재기의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최익현은 홍주성 공방 직후 태인에서 유생을 모아 의병을 편성하여 정읍, 곡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와 탄약을 마련하여 순창에 입성하였다. 당시 의병 수는 900여 명에 달하였다.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출동하여 이들 의병을 포위, 공격하자,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즉각 결전을 하겠으나,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못 하겠다.”는 내용의 전령을 진위대에 보내고 항전을 중단했다. 최익현은 일본군에 의하여 쓰시마 섬에 끌려갔으나,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다가 마침내 순절하였다.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인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활약도 뛰어났다. 그는 고향 영해에서 300명의 농민을 모아 의병을 편성하여 영해읍에 입성, 관군의 무기를 탈취하고 평해를 거쳐 울진으로 진격하였으며, 한때 의병의 수가 3000을 넘었다.

의병 전쟁의 격화

의병의 구국 운동은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우수한 최신 무기와 근대식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대적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서울 시위대는, 군대 해산 당일 대대장 박승환의 항거 자결을 도화선으로 하여 2개 대대가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것은 해산된 군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 이어 해산된 군대들도 의병에 가담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의 항쟁이었다.

원주 진위대는 전 군인이 일제히 일어나 원주 시민의 호응을 얻어, 출동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 원주 의병은 뒤에 강원, 충북,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강화 분견대는 강화읍을 장악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그 후 경기, 황해도를 무대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밖에, 홍주 분견대와 진주 진위대도 군대 해산에 대항하여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각처에서 항전하던 의병 부대에 해산 군대가 합류되자, 의병은 유생과 군인, 농민, 어민, 포수, 광부, 상인 등 국민 각 계층을 포함하게 되었고, 종래 가졌던 구식총인 화승총보다 성능이 우수한 신식 장총도 일부 보유하게 되었다. 또, 편제를 보다 전투적인 체제로 정비하였고, 경험이 있고 훈련된 군인들이 가담하여 작전 능력도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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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을 전개한 의병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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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부대는 전국에 확산되어 곳곳에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만강 건너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까지 미쳤다.

일본군의 의병 진압 작전은 무기를 든 의병 부대에 대한 공격에만 그치지 않고, 한반도 각처에서 마을을 불사르고 양민을 학살하며, 곡식을 모두 탈취하는 초토화 작전을 폈다. 이러한 실례로 제천에서 약 80호의 마을이 일본군에 의하여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였으며, 여주, 지평, 양근, 원주 등에서만도 민간인 3천여 명 이상이 학살되었고, 불탄 집이 5천여 호나 되었다.

의병 전쟁의 확대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는, 전국의 의병을 연합하여 적의 수중에 들어 있는 서울을 진공, 탈환하려는 연합 작전을 계획하였다.

관동 의병장 이인영이 중심이 되어 먼저 전국 의병장에게 의병의 일치 단결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 양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사람을 서울에 잠입시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교전 단체이므로 정의 인도적 입장에서 성원해 주기 바란다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 계획은 실로 의병 운동이 정치적으로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양주에는 민긍호, 이강년, 허위 등 많은 의병장이 각기 의병을 이끌고 집결하여 약 1만 명의 의병이 모였다(1907). 모인 의병 중 해산 군인이 3천 명으로서, 그들은 장총을 가졌고, 그 밖에는 대부분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고, 1만 의병을 24개 진으로 나누어 서울 진공 작전을 벌였다. 먼저 300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병력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또 후속 부대와의 연락이 끊어져 고전을 겪었다. 의병 부대는 얼마 후 서울 진공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그 후, 일본군과의 대규모 작전이 불리함을 안 의병들은 산간 벽지를 근거로 하는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항전하였으나, 국권 침탈을 계기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후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대일 항전의 무대를 옮겨 갔다.

한편, 의병의 항전이 전국에서 계속되는 동안,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을 이끌고 이범윤과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삔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요 대륙 침략의 선두에 나섰던 이토오를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의 외교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침략 정책을 추진, 선전하던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를 사살하였으며,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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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글씨
안중근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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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의병과 의사들의 구국 항전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민족의 자주성과, 우리의 역사적인 전통 속에 담겨져 있는 자주 독립의 의지를 가진 민족의 저력이 발휘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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