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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복군의 대일 전쟁

광복군의 결성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 단체와의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외교적인 활동만을 전개하였었다. 임시 정부가 숙원 사업인 광복군을 창설하여 군사 계획을 개시한 것은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였다. 광복을 위해서는 일본과 결전을 벌이는 길이 최선이며, 국제 정세도 일본과 전쟁할 시기가 임박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군사 계획을 추진함에 있어서 큰 장애는 훈련받은 군사 인재의 부족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 정부 산하에 정규군이 필요하였다.

이에 임시 정부의 김구, 김규식, 지청천 등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쟁하던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 산재해서 독립 운동에 종사하던 수많은 한국 청년을 모아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이보다 앞서 김원봉의 조선 혁명당 쪽에서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1938) 중국 각지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광복군은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여 3개 지대로 보강함으로써 증강되었고,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 전쟁에 참전하려고 노력하였다.

대일 선전 포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같이 여러 번 옮겨 다니다가 충칭에 정착한 이후 정부 체제를 본토 수복을 위한 임전 태세로 재정비 강화하였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각지의 무장 세력을 임시 정부 산하의 광복군으로 통합하면서 군사 훈련을 통해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한국인의 동양 평화 애호 및 독립 열의에 감복하여 광복군의 활동에 대하여 물심 양면으로 협조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1941), 임시 정부는 즉각 대외 활동을 펴 대일, 대독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켜 침략자를 무찌르는 데 앞장 섰다(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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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선전 포고문
대일 선전 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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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은,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모두 독립 전쟁을 위한 전투 지역이라는 판단하에 각지에 파견하였는데, 광복군을 버어마, 인도 전선에까지 파견, 참전시켜 영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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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 파견된 한국 광복군
영국군에 파견된 한국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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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전에 참전한 광복군은 전투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대적 선전, 포로 심문, 암호문 번역, 선전 전단의 작성, 회유 방송 등에 주력하였다. 이처럼 한민족을 대표하는 광복군은 여러 가지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항전을 계속하였다. 조국의 광복은 줄기차게 계속된 이러한 독립 전쟁의 댓가라고 할 수 있다.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

광복군은 동남아 일대에서 대일전에 참전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온 겨레의 숙원인 조국의 광복을 우리 손으로 쟁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 진입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비행대까지 편성해 놓았던 광복군은,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제2지대장 이범석 등에 의해 국토 수복 작전의 임무를 맡은 국내 정진군의 특수 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은 그 해 9월에 국내 진입을 실행하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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