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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5차(상)
  • Ⅱ. 고대 사회의 발전
  • 1. 고대 사회의 형성
  • (2) 삼국의 성립과 고대 사회

(2) 삼국의 성립과 고대 사회

초기의 고구려

고구려는 졸본 지방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여러 소국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서력 기원 전후에 도읍을 압록강 중류 통구 지방의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후 고구려는 이 곳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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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산성자 고분군(만주 집안현 소재)
고구려의 산성자 고분군(만주 집안현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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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고구려 성장 과정에서 2세기 태조왕 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우선,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과 통합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어 현저한 대외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만주 지방에서의 세력 확대 이외에 함경도 지방의 옥저를 정복하고, 낙랑에 대해서도 자주 압력을 가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적 발전에 힘입어, 왕권이 성장하면서 계루부 고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집권적 관료 조직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된 중앙 집권 국가 체제로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백제

백제는 한강 유역에 위치한 마한의 한 소국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하하여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웠다고 한다(B.C. 18). 이것은 백제가 고구려의 유이민에 의해 건국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도읍이 오늘의 서울 지역이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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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 토성
몽촌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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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역의 백제는, 이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면서 마한을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에 이르러,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통치 조직을 갖춤으로써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한성을 중심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한 군현과 항쟁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을 제정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개혁 작업은 백제의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의 신라

경주 지방의 사로국으로부터 발전한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B.C. 57).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왕에 해당하는 이사금을 배출하였는데, 곧 이어 6부족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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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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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라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경북 지방 일대의 큰 나라로 성장하여,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때에 신라는 영토를 낙동강 유역까지 확장하였고, 내부적으로 체제의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박, 석, 김의 3성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 대신,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대수장(大首長)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마립간이라는 왕호가 내물왕 때부터 사용된 것도 이와 같은 왕권의 성장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가야 연맹

삼국이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발전해 가는 시기에,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 지역에서는 별도의 독립적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2, 3세기경, 이들 지역에서는 김해의 금관 가야를 주축으로 하는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가야 연맹은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철의 생산과 중계 무역을 통하여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5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압력으로 큰 타격을 받고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5세기 이후, 가야는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고령 지방의 대가야로 그 중심이 이동되면서 연맹의 세력권이 다시 편성되었다. 그러나 끝내 삼국과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 신라 등 주변 여러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신라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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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지산동 고분
고령의 지산동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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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의 위치
가야 연맹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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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발전이 미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야 연맹은 주변의 여러 나라 이외에 한 군현이나 일본과도 교역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당시의 수준 높은 문물은 가야 무덤에서 출토되는 각종의 유물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가야 문화를 보여 주는 유적으로는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함안 말이산 고분, 창녕 계남리 고분 등이 유명하며, 이들 고분에서 금동관, 철제 무기와 갑옷, 토기 등이 발굴되어 가야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가야 토기는 일본에 전해져 스에키(須惠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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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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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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