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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문과 기술의 발달

삼국의 학문과 기술

삼국 시대에는 우수한 문화를 배경으로 한 중국의 한자와 그 문학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대부분이 한자를 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삼국 시대의 지명이나 향가 등을 보면,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만든 이두로써 우리말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식의 기록은 삼국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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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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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고, 태학을 세워 한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지식층에서는 경서와 역사서가 읽혀졌다. 또, 각처에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한학이 발달하여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가 있었으며,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신라에서도 한학이 널리 연구되었다. 임신 서기석에는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의 정치⋅사회적 발전과 한학의 발달은 역사서의 편찬 사업을 일으키게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역사가 편찬되어 유기가 있었는데, 이것을 이문진이 간추려 신집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편찬이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신라의 진흥왕 때와 같이 국력이 크게 번성하던 때에 있었던 것이 주목된다.

한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역학, 의학 등 과학 연구도 활발하였고, 공예, 건축 등 기술 부문에서도 상당한 발달을 보였다.

삼국은 모두 농업에 기본을 두고 있어서,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이 발달하였다.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이며, 물리학적 지식까지 응용되어 축조되었다. 또, 건축에는 기하학의 원리를, 역학에는 수학을 응용하였다. 사원의 경우, 가람과 탑을 적절히 배치하기 위해 기하학의 원리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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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경남 하동 소재)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경남 하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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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금, 은, 동의 세공 및 도금 기술은 신라의 금관이나 백제의 칠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유리로 된 구슬과 그릇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유리를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의 학술

통일 신라의 학술은 일반적인 한학은 물론, 기술 분야인 의학, 병학, 역학, 산학, 율학 등을 포함함으로써 그 범위가 사회 생활을 실제로 이끌어 갈 정도로 크게 넓어졌다.

한학에 있어서는, 통일 초의 문장가로서 강수를 들 수 있다. 그 뒤의 설총은 경서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 학문 성적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자는 새로운 원칙을 세워, 원성왕 때에 성적을 3품으로 구별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삼품과를 마련하였다(788). 이 제도는 골품 제도로 말미암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으나, 학문을 보다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는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한문학은 통일 초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성덕왕 때에 김대문은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하여, 문화를 주체적으로 의식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당에서 공부한 유학생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운경, 김가기, 최치원 등이었다. 그들은 골품 제도에서 오는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최치원은 진성 여왕 때에 문란해진 정치를 바로잡고자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자 정치에 뜻을 잃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훌륭한 저술과 뛰어난 문장을 남겼다. 그가 지은 계원필경과 비문의 일부가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다.

한편, 천문, 수학, 역학, 의학, 병학 등의 기술학도 발달하였는데, 병학과 천문학에서는 김암이 조예가 깊었으며, 의학은 삼국 시대에 수입되었던 중국 의학이 더욱 발달하였다.

또, 목판 인쇄술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나온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다. 이것은 8세기 중엽에 인쇄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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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경(원명은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다라니경(원명은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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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 지리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경험에 의한 인문 지리적인 지식을 활용하려는 학설인데, 뒤에 예언적인 도참 신앙과 결부되었다. 이를테면, 송악이 나라의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각 지방에 있어서도 그 지세에 따라 좋고 나쁜 곳이 있다고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때까지 경주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이끌어지던 행정 조직을 고쳐, 국토를 지방 중심으로 재편성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여,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발해의 학문

발해 역시 당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당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수입하고, 당에 유학생도 보내어 일찍부터 학문이 발달하였다.

유학생 중에는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왔고, 외교 사신이나 승려 중에는 한시에 능한 사람도 많았다.

동경성에서 발견된 압자와(押字瓦) 중에 한자와는 다른 발해 문자가 있었으나, 아직 판독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독자적인 문자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인 외교 문서는 물론 국내외에서의 공식 기록은 한문을 사용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 공주 묘지와 정효 공주 묘지1)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과 넷째 딸이며, 그 각각의 묘지가 1949년과 1980년에 만주 화룡현에서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발해 문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가 세련된 사륙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능숙한 한문을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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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 공주 묘비(만주 화룡현 소재)
정효 공주 묘비(만주 화룡현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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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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