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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귀족 지배 체제의 동요와 무신 정권

귀족 정치의 전개

왕권이 안정된 이후의 고려 사회를 일반적으로 귀족 사회라고 부른다. 고려 태조는 신라 말 혼란기에 대 호족의 하나로서 정권을 잡고 고려를 건국하였으며, 그의 후손들도 오랜 동안 호족 세력 때문에 시련을 당해야만 했었다. 그리하여 고려 왕실에서는 가능한 한 무력을 가진 자를 견제하려 하였으므로, 정치 체제는 자연히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문신 관료 중심 체제로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지방의 호족 출신들도 과거를 통하여 중앙 집권 체제 속의 관료가 되어 갔다. 문신 관료들은 지배 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문벌 귀족화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귀족은 신라의 귀족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즉, 신라의 귀족이 골품제에 토대한 혈연 본위의 폐쇄적 존재였다면, 고려의 귀족은 보다 능력 본위의 개방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전기는 이러한 귀족들이 중심을 이룬 귀족 정치 시대로서, 이를 기반으로 귀족 사회가 발달하였지만, 이들은 점차로 음서제나 공음전 제도 같은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차지하면서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을 띠어 갔다.

이자겸의 난

문벌 귀족 사회가 전개되면서 문벌 귀족들은 그들 상호간에 폐쇄적인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최고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왕실과의 통혼을 추구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문벌을 높이고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대표적인 문벌은 경원 이씨였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된 이래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 때에 거듭 외척이 되어 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게 되었다.

인종은 이를 염려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는데, 이자겸이 먼저 척준경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인종을 가두고 독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 후,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자, 왕은 척준경을 달래어 이자겸을 제거하였고, 얼마 후 척준경도 정지상 등에게 축출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불안해지자,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므로 서경으로 서울을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 때, 묘청 등은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여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기도 하고, 또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실권자였던 김부식 등은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여 서경 천도나 금국 정벌을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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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궁 토성터
대화궁 토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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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대립이 계속되어 서경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난을 일으켰다(1135). 이 서경 천도 운동은 1년간이나 계속되었으나,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 내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 풍수 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 등의 여러 가지 원인이 얽혀 일어난 것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의 폐단과 모순을 드러낸 것으로서, 이들은 모두 진압되었으나 그 근본적인 문제는 시정되지 않았다.

무신 정변

문벌 귀족 사회에 있어서 무신의 지위는 문신보다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전시과의 토지 분배에 있어서도 무신은 문신보다 차별을 받았다. 게다가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일부의 젊은 문신들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았는데, 이 때에 문신들은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을 멸시하였으므로 무신들의 반감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왕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웠다(1170).

무신 정변으로 문신 중심의 정치 조직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무신들이 집권하게 되었다. 무신들의 최고 회의 기관은 중방이었으므로, 나라의 정치는 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무신들은 문신들이 지내던 고관 요직을 차지하고, 사전과 노비를 늘렸으며, 또 사병을 두고 저마다 권력을 다투었다. 그리하여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도방(都房)을 두어 신변을 보호하며 정권을 휘두르다가 병사하자, 이의민이 세력을 잡았고, 이의민은 얼마 후 최충헌에게 피살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사회의 동요

무신 정변 이후 무신들이 정권을 독점하자, 명종 때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다음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 등이 지방군을 이끌고 중앙의 무신들을 공격하려다 실패하였다. 한편, 승려들도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마침내 천민과 농민들도 신분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 즉,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들의 난, 운문의 김사미의 난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문신 중심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고려 사회의 모순이 노출된 사회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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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천민의 항쟁
농민과 천민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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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무신 정권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처음에는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즉, 토지 겸병과 승려의 고리대업 금지, 조세 제도의 개혁 등 시무 10조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주장과는 달리, 최충헌은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사병을 길러서 자기 세력을 확고히 하였으며, 또 혼란에 대비하여 도방을 두어 자기 신변을 경호하게 하였다.

최충헌은 따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정적을 감시, 숙청하면서 무단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 장관인 교정별감의 자리는 최씨 일가가 대대로 세습하였고, 도방과 삼별초는 이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자기 집에다 정방(政房)을 두고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여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으나, 전날의 무신들과는 달리 문신들을 우대하였다. 이인로, 이규보, 최자 등이 모두 최우 집권하에서 활동한 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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