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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근세 사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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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경제 활동

(4) 경제 활동

농업

중농 정책을 채택한 조선은, 농업 생산을 높이기 위하여 토지 개간, 수리 시설의 확충, 종자 개량, 농업 기술의 혁신 등에 주력하였다. 개간은 내륙의 황무지는 물론, 변경 지방과 해안 지방에까지 이루어짐으로써 건국 초에 100만 결 정도였던 농지가 15세기 중엽에는 160만 결로 늘어났다. 저수지 또한 수천 개소로 늘어났으며, 바람과 가뭄에 강하고 일찍 수확되는 벼 품종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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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결 수 증감표
토지 결 수 증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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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일반적으로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는데,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모내기법과 벼와 보리의 2모작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또, 밑거름과 덧거름을 주는 시비법의 발달로, 해를 건너서 휴경하지 않고 매년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목화 재배가 확대되었고, 각종 원예 작물과 약초 및 과수의 재배가 널리 보급되었다. 또, 농사직설과 금양잡록이 간행되어 농업 기술을 널리 보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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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
농사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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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대부분은 상민의 신분으로서, 양반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였으며, 이들은 토지에 얽매여 이주의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공사(公私)의 외거 노비가 있었으니, 이들은 천민이었으나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어서 전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고려 말 이래 계속하여 이루어져 온 농업 발전의 결과로 농업 생산력이 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으며, 또 경영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지주에게 유리한 것이었으며, 농민의 생활은 여전히 궁색하였고, 토지에서 유리되는 현상도 있었다.

이에, 잡곡, 도토리, 나무 껍질 등을 가공하여 먹는 방법을 제시한 구황촬요를 보급하여, 농민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호함으로써 토지에서의 유리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농민의 유망을 막을 수 없어 호패법, 오가작통법 등을 강화하여 더욱 엄격히 통제하고자 하였다.

수공업과 공장

조선 초기의 수공업은 국가의 통제 아래에 있는 관영 수공업 체제였다. 즉, 전국의 전문적인 수공업자인 공장(工匠)들을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소속시켜, 일정한 기간 동안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조하게 하였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을 관장1) 그 수는 서울의 여러 관부에 소속된 경공장 2880여 명과 지방의 감영, 병영, 수영 및 군현에 배속된 외공장 3500여 명 정도였다.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국역으로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공장은 일정 기간의 국역이 끝나면 자유롭게 생활 필수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대신에 세를 내었다. 전문적인 공장 외에도, 농민들은 가내 수공업을 통해서 면직물, 농기구 등 생활 필수품을 만들었다.

한편, 도시에서는 전문적인 민영 수공업도 성장해 가고 있었다. 민영 수공업자 중에는 관청에 등록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민영 수공업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그 성장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상업과 화폐

상업도 수공업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제 아래에 있는 시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에는 일찍부터 종로를 중심으로 한 도로변에 시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관청에서 상인들에게 점포를 빌려 준 것이었다. 이들 시전 중에서 점차로 비단, 무명, 명주, 모시, 종이, 어물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일에 이를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시전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가지는 대신,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바쳐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지방의 일부 도시에도 시전이 있었으나, 주로 보부상이라는 행상들이 대개 5일마다 열리는 장시를 통하여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을 유통시켰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장시는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5세기의 상업은 정부의 통제 정책, 교통⋅운송 수단의 미비, 화폐 유통의 부진, 유교적인 검약 생활로 인하여 물화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아 크게 발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상공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15세기에는 화폐의 유통 또한 활발하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의 화폐로는 저화와 조선통보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 화폐는 일반 사회에서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고, 물품 거래에는 여전히 쌀과 포목이 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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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
조선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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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상업과 마찬가지로, 대외 무역 역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고,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 무역과 사신의 수행원에 의한 사무역이 행해졌으며, 일본과는 왜관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진과는 조공 무역과 무역소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동남 아시아 지역과는 약간의 무역이 행해졌을 뿐이다. 대외 무역에 있어서 수출품은 대개 생활 필수품인 데 반하여, 수입품은 주로 특권층을 위한 사치품이 대부분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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