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두 흐름
조선 초기의 유학은 새 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사장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정치, 경제에 보다 관심을 가진 관학파 학풍이며, 다른 하나는 경학을 중시하여 유교의 기본적인 정치 철학의 추구에 주력했던 사학파 학풍이었다. 이 두 학파 간에는 실제로 학문의 경향과 현실 정치에 대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하면서 신진 사대부들은 전통적인 유학과 불교, 도교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성리학을 새로운 정치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다. 정도전과 권근 등 관학파는 성리학을 정치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 개혁과 국가 운영의 기본 정신으로 삼아, 왕권의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새 왕조의 개창과 지배 체제의 정비에 공이 많았던 이들 관학자들은, 국가 체제가 갖추어지고 불교의 사회적 폐단이 많이 시정된 15세기 중엽 이후로는 성리학만을 크게 내세우지 않고, 불교, 도교, 풍수 사상, 민간 신앙 등 여러 사상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정책을 썼다.
이러한 사상 정책은 특히 세종, 세조에 의하여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이들은 뒤에 훈구파라 하여 사림파의 학자와 구별되었다. 훈구파는 성균관과 집현전 등을 통해서 양성되어, 수준 높은 근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와는 다르게, 조선 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성리학 자체의 명분에 보다 충실하려는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의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역성 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 건설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정몽주, 길재 학통에서 연원하고, 김종직, 김굉필로 그 학통이 이어지면서,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고, 이어 그 세력이 기호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사학을 통해서 양성된 사림파는, 16세기 이후의 사상계를 성리학 중심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유교의 왕도 정치 사상을 체득하여, 성리학의 정통 계승과 유교적 이상 정치를 추구하였다. 사림 정치가 진전됨에 따라 성리학은 점차 경세적 기능보다는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의 발달
15세기 말부터는 중앙의 훈구 세력과 지방의 사림 세력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일어나고, 사림 자체에서도 안정된 생활 기반을 가진 층과 그렇지 못한 층 사이에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국제적 긴장도 크게 완화되어, 평화적인 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적 조건은 심오한 철학적 이론과 학문적 논쟁이 피어나, 성리 철학이 크게 융성할 수 있게 하는 여건이 되었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며, 다른 하나는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이어 조선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지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리 철학은 대체로 향촌에서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을 가진, 생활이 비교적 안정된 사림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 문제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황의 학통은 김성일, 유성룡 등의 제자에 의하여 영남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 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이황의 이기 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론적인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경세가로서도 현실 문제의 개혁에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성학집요, 동호문답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그의 학통은 조헌, 김장생 등으로 이어져서, 앞의 영남 학파에 대칭되는 기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이르러 사림은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심오한 이기 철학을 성립시키고, 왕도적 정치 철학을 확립하여 정치의 활성화에 공헌했으나, 지나친 도덕주의로 인하여 현실적인 부국 강병책을 소홀히 하였다.
예학과 보학의 발달
성리학의 발달로 나타난 예학(禮學)은 도덕 윤리를 중시하였고, 명분 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양반들이 신분 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를 중요시함으로써, 상장 제례에 관한 예학이 이기론과 함께 크게 발달하였다. 가정의 의례는 주자가 가르친 가례1) 가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명나라 구준이 수집하여 편찬한 책으로, 주자학의 수용과 때를 같이하여 조선 사회에 보급되었고, 소학 교육과 함께 국가에서 적극 권장하였다.를 모범으로 하였는데, 김장생, 정구 등이 나와 이를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면서 이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이루어졌다.
예학의 발달은 가족과 종족 상호간의 상장 제례의 의식을 바로잡고, 유교주의적 가족 제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점도 있으나, 지나치게 형식에 사로잡힌 감이 있고, 또 사림 간의 정쟁의 구실로 이용되는 폐단도 있었다.
또, 사림 양반들은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우위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필요에서, 족보를 만들어 종족의 내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암기하는 것을 필수적인 교양으로 생각하였다.
종족 내부의 의례를 규제하는 것이 예학이라면, 보학(譜學)은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족보를 통해서 안으로는 종족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종가와 방계를 구별하여 위계를 정하였으며, 밖으로는 다른 종족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서 문벌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또, 족보는 결혼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족보의 편찬과 보학의 발달은 조선 후기에 더욱 성해짐으로써 양반 문벌 제도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