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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1. 근대 사회로의 지향
  • (1) 사회 변화와 서민 의식의 성장

(1) 사회 변화와 서민 의식의 성장

양반 사회의 동요

16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의 변화가 일어났다. 왕권이 약해지고, 정치의 실권이 양반 관료에게로 넘어가면서, 양반 계층의 자체 분열이 일어나 정쟁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지배 계층으로서의 양반 관료들은, 정치적 실권을 바탕으로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리면서 보수적 성향을 강화시켜 갔다. 그들이 내세운 성리학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이기론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철저히 관념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한편, 군적 수포제(軍籍收布制)1) 현역 복무를 면해 주는 대신, 병역 의무자에게서 포를 징수하는 방군 수포 현상은 불법적 행위였을 뿐 아니라, 그 값이 너무 비싸 오히려 정부가 그 값을 공식으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즉, 중종 때(1541년)에는 나라에서 군포를 수납하고, 현역 복무를 면제시켜 주는 군적 수포제를 실시하였다. 이 군적 수포제의 실시로, 양반은 군포 부담에서 제외되고, 상민 신분만이 부담하게 되어 군포의 부담은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었다.를 공식화함으로써 양반과 상민의 구분을 한층 확연히 하였을 뿐 아니라, 농민의 부담을 보다 가중시켰다.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도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가 약화되면서 여러 가지의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기본 토지 제도인 과전법이 유지될 수 없어서 16세기 후반에 폐지되었고, 상업과 수공업에 대한 통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부역제에 의한 노동력의 강제 동원도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 관료들에 의한 토지 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더욱 심해져서 국가 재정을 위축시켰고, 농촌 경제를 악화시켜 농민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환곡제는 오히려 농민의 궁핍화를 초래하였다.

농민들은 나름대로 살 길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농토를 빼앗기고, 힘겨운 군역을 부담해야만 했던 농민들은 도저히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못한 채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남의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2) 양반 관료들의 토지 겸병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그 위에 수취 구조의 모순과 문란 속에서 농민층의 토지 이탈은 16세기 이래 심해지고 있었는데, 충청도 단양 지방의 경우에는 1454년에 235호이던 양민 호(良民戶)가 1557년에는 40여 호로 격감했다고 한다. 토지를 이탈한 농민은 그 일부가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대개 유랑민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두 차례에 걸쳐 전국을 뒤흔든 외침이 있었다. 양 난은 지배 체제를 크게 동요시켰고, 지배층으로서의 양반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 계층 내부의 정쟁은 더욱 치열해져 갔는데, 정쟁의 내용은 대부분 백성들의 생활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정부의 정책적 혜택을 크게 기대할 수 없게 된 백성들은, 농촌에서는 영농 기술을 개발하면서 경영을 합리화하고, 도시에서는 상공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해 나가기도 하였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일부의 농민들은 신장된 경제력에 의해 생활의 안정과 정신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비록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서당 교육을 통해 교양을 쌓아 갔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그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 줄 한글 소설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한글 소설은, 양반을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냄으로써 서민의 의식 수준을 높여 주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각지에 장시가 발달하였는데, 장시는 교역의 장소일 뿐 아니라, 농촌 사회의 정보 교환과 오락 장소의 구실도 하였다. 장시에 나온 사람들은 대화와 주연 가운데서 사회 의식을 키웠고, 판소리, 타령, 잡가 등을 통해 양반 중심 사회의 모순과 지배 질서의 문란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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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각성

양 난 이후, 조선 왕조는 사회 체제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질서가 모색되었는데, 그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근대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근대 사회의 싹은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나타났다. 그러한 근대 사회의 태동에 있어서 특히 주목된 것은 피지배층의 역할이었다.

조선 사회에 있어서 피지배층은 정치적으로는 지배 권력에 예속되었고, 신분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피지배층에는 상인, 공장, 노비 등도 포함되었지만, 대다수는 직접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들이었다.

농민이라도 그 내부에는 여러 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그 상층은 중소 지주로서,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타인에게 대여하여 소작제로 경영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몰락 양반이나 중간 계층과 연결되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농민의 대다수는 자영 농민이거나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은 영세한 토지 소유자이거나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서,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 수익의 일부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농민은 국가에 대해서 전세, 공물, 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위정자들은 농민들로부터의 이러한 수취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이들의 이동을 억제하고, 토지에 묶어 두기 위하여 호패법(號牌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대를 이어 가며 한 곳에 살면서 자급 자족적인 경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이미 16세기에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해져 지배 체제의 모순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즉, 양 난 후에는 지배 체제가 크게 동요하여 국가 재정의 파탄과 관료 기강의 문란이 초래되었고, 농촌 사회는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더욱이, 사회 혼란과 위기 의식의 증대는 농촌 사회의 시련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위정자들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대동법과 균역법을 실시하였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지배층의 탐학은 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날로 심해져 갔다. 지배 권력의 독선과 탐관 오리의 부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마침내 19세기에 이르러 이른바 민란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층은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개혁 사상을 제시하였다. 실학자로 불리는 이들 진보적 지식인들은 대개 몰락 양반들로서, 그들의 일부는 농업 또는 상공업 활동에 직접 종사하면서 생활을 꾸려 가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부농층과 임노동자

조선 후기에 있어서, 기존의 사회 질서와 가치관에 대하여 특히 주도적으로 항거한 것은 농민이었다. 농민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진출에 법적 제약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의 억압과 횡포로 인하여 대다수의 농민들은 영세한 소작농이 되거나, 농토에서 이탈하여 갔다.

시련이 거듭되는 속에서도 일부 농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여 갔다. 즉, 그들은 이른바 경영형 부농으로 부상하거나 상공업으로 생업을 영위하고, 또는 도시나 광산의 임노동자가 되어 갔다.

경영형 부농은 대체로 자작농에서 나타났지만, 소작농에서도 나타났다. 어느 경우에서이건, 지주와는 달리 스스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상품 작물의 재배 등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 갔다.3) 경영형 부농은 경작 규모의 확대와 영농 방법의 개선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는가 하면, 유통 경제가 발달해 가고 있던 당시의 현실에 부응하여 목화, 담배, 고추, 인삼, 채소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 시장에 내다가 판매하여 영리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소요되는 농업 노동은 대체로 임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부를 축적한 농민들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공명첩이나 족보를 사서 양반 신분을 획득하여 갔다. 그리하여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그 결과 양반의 권위가 떨어졌다. 이들 부농층이 양반 신분을 획득하는 것은 자신과 자손의 군역 부담을 면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이득 이외에도,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제 활동에서 편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의 축적을 통해 신분을 사서 군역의 부담을 면하게 된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키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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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의 농민들이 부농층으로 성장해 가고 있을 때, 대다수의 농민들은 오히려 토지에서 밀려나 대체로 임노동자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 있어서, 정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원칙적으로 농민의 부역 동원으로 충당되었고, 양반 지주층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노비나 소작농의 부역 동원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래로 부역제가 해이해져, 17,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도 부역 동원이 불가능해지면서 점차 임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하였다. 궁궐이나 각 관청에서 필요한 일꾼도 노임을 주고 고용해 썼으며, 지방 관청에서 주관하는 축성이나 도로 공사에 동원되는 인부들도 노임을 주고 부려야 했다.

농업 경영 방법의 개선으로 경작지를 확장하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던 부농층도, 가족의 노동만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임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농촌에서는 대체로 1년을 계약 기간으로 하는 품팔이 노동력이 많았다.4) 18세기 말의 실학자인 서유구에 의하면, 황해도 지방의 농가에서 해마다 담배 농사에 일꾼을 고용하는 데 드는 한 사람의 1년 품삯이 300전에 불과하며, 만약 500전 내지 700전만 주면 하루 사이에 수백 명을 모집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의 쌀값은 대체로 15두에 20전 내지 30전이었다. 부농층의 대두와 임노동자의 출현은 이 시기의 농민 분화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져 갔다.

중간 계층의 성장

사회 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서얼과 중인 등 중간 계층의 역할도 커져 갔다.

서얼은 양반 사대부의 소생이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해 사회 활동에서 각종 제한이 가해져서 사회적 불만이 컸다. 그리고 기술직을 담당하거나, 이서(吏胥)로서 행정 실무를 맡고 있던 중인층은 사회적으로 그 역할이 크면서도 역시 고급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 중간 계층은 꾸준히 지위 상승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신분의 상승을 추구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자, 서얼들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은 영⋅정조 때의 개혁 분위기에 편승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 수 차례에 걸쳐 상소 운동을 폈고, 중요한 직책에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이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되기도 하였다.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에 자극되어, 기술직에 종사하던 중인들도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본래 중인은 그 역량이 뛰어날 경우에는 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법제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으나,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가 강화되면서 법전의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중인들은, 일찍부터 불만을 품어 왔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제 변동에 부응하여 재력을 축적하고, 또 문화 활동을 통하여 지식 수준도 높아지면서,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철종 때 대규모의 소청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인들의 노력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전문직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부각시켰다.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대청 외교 활동에 참여하면서 서학 등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여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이들 중간 계층의 활동은, 농민의 주체적 움직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 변동에서 자못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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