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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정치 체제의 변화
  • (3) 탕평책의 실시

(3) 탕평책의 실시

붕당 정치의 문제점

붕당 정치는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의식과 정치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붕당을 이루고, 언론 활동을 통해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그것은 여론을 앞세운 것으로서, 비판 세력이 공존하며, 특정 붕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산림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서 건전한 정치 풍토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공론과 공리보다 집권욕에만 집착할 때에는 균형 관계가 깨어져서 정쟁이 끊이지 않고 사회가 분열되었다.

더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극단적인 정쟁과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자, 세력 균형 위에서 안정될 수 있었던 왕권 자체가 불안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탕평론(蕩平論)이 제기되었다.1) 탕평이란 용어는, 서경(書經) 홍범조의 ‘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왕도는 동양 사회의 기본적 정치 원리로서, 임금은 항상 치우침이 없이 공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왕도 정치에서는 실천 방안으로서 ‘毋偏毋黨 毋黨毋偏’이 중요시되었다. 나아가,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고, 붕당 상호간에 조화가 이루어져야 함이 요청되었다.

탕평론의 대두

탕평론의 본질은 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함에 있었다. 정치적 균형 관계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각 붕당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권에 의해 타율적으로 중재되어야 했다. 17세기 초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 관계를 이룬 것은 전자의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부터는 오히려 후자의 방안이 요청되었다.

탕평책은 숙종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 때에는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특히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숙종은, 인사 관리에 주목하여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기용하며, 붕당 사이의 화합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예컨대, 인사 정책에 있어서, 공평을 내세운 그 자신이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숙종의 탕평책은 무의미해져 갔다.

영조의 탕평책

영조가 초기에 시도한 탕평책도 숙종 때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정국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조 스스로가 소론을 내몰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편당적인 조처를 취해 정국의 불안만을 조성하였다. 붕당의 세력이 비대해진 정국에서, 기반이 약화된 왕권으로 정국의 수습을 모색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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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였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조성할 수 있는 힘은 왕권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일련의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여 갔다. 나아가, 영조는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 집단인 이른바 탕평파(蕩平派)를 육성,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로써 치열하던 정쟁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으며,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간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실제적으로도 붕당 간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즉,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해 있었으나, 소론의 강경파에 의해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론은 점차 입장이 약화되고 노론의 우세가 두드러져 갔다.2)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은 모두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즉, 영조가 탕평책을 추구하였으나, 실제는 노론 세력이 커지자 소론이 이에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켜 세력을 만회하여 보려던 움직임이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 4년(1728년) 청주에서 일어났고, 나주 괘서 사건도 영조 31년(1755년) 윤지 등이 나주에서 모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두 차례의 움직임이 모두 실패하면서, 소론은 정계에서 그 위치가 크게 약화되었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다.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의 난립이 금지되었고,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역의 폐단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가 부활되었으며,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 등이 편찬되어 흐트러진 문물이 재정비되었다.

정조의 탕평책

노론은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3) 시파는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사도 세자를 동정하였으며, 벽파는 사도 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영조를 지지하였다. 시파에는 노론의 일부와 당시 불우했던 남인, 소론 계통이 많았고, 벽파에는 노론 강경파들이 많았다.로 나뉘었다. 벽파의 압력 속에서 세손 때부터 그 지위가 불안하였던 정조는, 즉위 후 벽파를 물리치고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탕평책을 내세워 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규장각을 두어 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하였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국왕의 문적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진보적 학자들을 모아 붕당의 비대화를 막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정치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조는 문헌 편찬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대전통편, 동문휘고, 규장전운,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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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규장각 서고
한말의 규장각 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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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반 세력의 균형을 꾀하려는 탕평론의 제창과 관직의 안배만으로는 지배 체제의 모순을 시정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탕평론 자체는 전제적 통치 체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모순의 시정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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