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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

(5)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

청과의 관계

호란 이후, 조선의 청에 대한 적개심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여 북벌 정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정치적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청에서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국력이 신장되고 문물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의 사신 일행은 청에 다녀온 후 기행문이나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를 통하여 청의 소식을 전하였고, 각종 서적을 구입하여 왔다. 그리고 조선 학자 중에는, 청을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을 펴는 학자도 있었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조선에 대하여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명백히 하자는 교섭을 해 왔다. 백두산은 지형적으로 만주와 한반도를 연결시켜 주며, 역사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영봉(靈峯)으로서 우리의 민족 정기를 상징해 오는 곳이었다.

조선과 청 양국은 마침내 백두산을 답사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되었다(1712).1) 정계비는 백두산 산정 동남쪽 약 4km, 해발 2200m 지점에 세워졌는데, 그 비문에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이라 되어 있다. 정계비에 의하면,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이었다. 이 정계비는 후에 그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 사이에 간도의 귀속 문제에 대한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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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
백두산 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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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조선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도주를 통해 교섭을 허용해 줄 것을 조선에 간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저질렀던 잘못을 탓하면서도, 국초 이래의 교린 정책의 원칙에 맞추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기유약조). 그리하여 부산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고, 이 곳에서 일본인들은 쌀, 무명, 인 삼 등을 구하여 갔다.

또, 일본은 조선을 문화의 선진국으로 여겨, 조선의 사절을 파견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특히, 막부의 장군직 계승이나 일본 국내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들은 조선의 사절을 맞이함으로써 정치적 권위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였는데, 그 일행은 대개 400여 명으로 편성되었으며, 일본에서는 국빈 대우를 받았다. 일본은 통신사 일행을 통하여 선진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애를 썼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구실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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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사행로(좌)와 대일 통신사의 행로(우)
대청 사행로(좌)와 대일 통신사의 행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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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도
통신사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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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해상의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영토였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이 자주 이 곳을 침범하자, 숙종 때 동래의 어민인 안용복이 일본 어민들을 울릉도로부터 축출하고, 일본에까지 건너가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 후, 정부에서는 울릉도 개척을 위해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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