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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학 사상의 발달

실학의 연구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일련의 사상 체계를 말한다.1) 성리학은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과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며, 현실적으로도 사회 기여의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허(虛)’의 학문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한 실정(實正), 실용(實用), 실증(實證) 등 ‘실(實)’의 학문으로서 유학의 본령을 되살리기 위한 사상 체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즉,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 개혁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 사상이나 개혁의 논리는 종래의 성리학과 같을 수 없었다. 실학 사상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러한 실학 사상이 나타난 데에는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조선 왕조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 질서의 와해 현상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즉, 16세기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조선 사회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모순을 드러냈으나, 위정자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지식인들은 국가 체제를 재편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둘째, 조선 왕조의 지배 원리였던 성리학이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본질적인 대책이 요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합리적인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셋째,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이 실학의 발생을 촉구하였다. 전쟁 피해의 복구 과정에서 피지배층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였는데, 이와 같은 발전을 촉진하고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실학 사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넷째, 조선 후기의 신분 변동이 실학자들의 관심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층의 경제적 몰락과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직면하여, 실학자들은 몰락한 양반층의 생계 대책과 서민층의 생존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다섯째, 서학의 전래가 실학 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학 서적들이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 지식인들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전하였다.

여섯째, 청나라의 고증학도 실학 사상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고증학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워, 학문 연구에서 실증적 방법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정한 자극을 주었다.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당시, 농촌 경제의 안정 여부는 사회의 안위와 국가의 존폐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 실학자들은 농촌 경제의 안정을 추구하여, 농민층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군사 제도, 교육 제도 등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는데, 그 때문에 경세 치용 학파라고도 한다.

실학자들은 특히 토지 소유의 편중으로 인하여 농민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보아,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토지 제도의 개혁 방안에는 차이가 있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웠다. 그는 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자영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영농을 바탕으로, 농병 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 일치의 교육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호 학파(星湖學派)를 이룰 정도로 많은 제자를 키워 낸 이익은 한전론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토지를 영업전(永業田)으로 하고, 그 밖의 토지는 매매할 수 있게 하여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제창하였다. 나아가, 그는 나라가 빈곤하고 농촌이 피폐한 원인으로서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사치와 미신 숭배 등을 들어, 이를 나라의 좀이라 규정하였다.

한편, 실학을 집대성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탕론, 전론 등 5백여 권의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균전론과 한전론을 모두 반대하면서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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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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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론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공동 소유, 공동 경작하고,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더 나아가 농민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여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백성의 이익과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 제도에 대한 개선 방안까지도 제시하였다.

실학자들은 농업 기술의 개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수리 시설의 확충, 종자와 농기구의 개량, 경작 방법과 시비법의 개선 등을 제시하였다. 농업 기술에 관하여는 특히 북학론자들의 관심이 컸는데, 그들은 청나라의 선진 농업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내 상공업의 발달과 청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경향을 보인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청의 문화와 청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고,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 등 물질 문화의 발달에 관심을 쏟았으므로 이용 후생 학파라고도 한다.

북학파의 선구자 역할을 한 유수원은 우서에서, 중국과 우리 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 농, 공, 상의 직업적 평등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유수원은 상공업을 진흥시키는 구체적 방안으로서 상인 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고용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을 제안하였다.

18세기 후반의 홍대용은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담헌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균전제를 주장하여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의 혁신과 신분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박지원에 이르러 북학 사상은 한층 발전되었다. 일찍이 그는, 과농소초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을 쏟은 바 있었는데, 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즉,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양반 문별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의 사상은 박제가에 이어져서 보다 확충되었다. 청나라를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는 상공업의 발달을 열렬히 희구하여, 그 방안으로서 청나라와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검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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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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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의 개혁 사상은, 농업에만 치우친 유교적 이상 국가론에서 탈피하여, 부 국 강병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국학 연구의 확대

실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선 후기의 사회를 단순히 그 시대의 현실로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어지고 미래로 연결되는 역사적 현실로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의 전통과 현실의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의 역사, 강토, 언어 등의 연구에 학문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현실에 대한 절실한 관심이 새로운 역사 의식과 문화 의식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먼저, 실학자들은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관심을 쏟았다. 이익은 체계적인 역사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여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한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통해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을 탈피하고, 한국사의 독자적인 정통론2) 성리학의 화이 사관(華夷史觀)에서는 중국 한족(漢族)의 역사를 주류로 인식하여, 우리 민족사에 대한 정통론은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정복은 단군 조선-기자 조선-마한-통일 신라의 정통론을 내세워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밝히고자 하였다.을 세워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한편, 한치운은 해동역사에서 다양한 외국 자료를 인용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서술로써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였다.

또, 이종휘와 유득공은 각각 고구려사와 발해사 연구에 큰 공적을 남겼는데,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기에 힘썼다.

시간성에 대한 관심이 국사의 연구로 나타났다면, 공간성에 대한 관심은 국토의 연구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새로운 지도가 제작되었다.3) 국토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축적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세계 지도와 서양 지리지가 전해짐에 따라,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 인식이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화이사상을 극복하는 세계관의 변화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곤여만국전도, 직방외기 등은 당시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이 시기에 펴낸 지리서로는, 유형원의 여지지, 이중환의 택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유명하였다. 특히, 택리지는 우리 나라 각 지방의 자연 환경과 인물, 풍속, 인심의 특색 등을 세밀하게 서술하였다.

지도 제작에는 정상기와 김정호의 업적이 뛰어났는데, 전자는 동국지도를, 후자는 청구도,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그 이전의 지도는 행정적, 군사적인 목적이 주가 되었으나, 이 시기의 지도에는 산업,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과 하천, 항만,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진 점에 큰 특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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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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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의 언어, 즉 한글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하여, 음운학과 어휘의 수집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음운에 관한 연구 성과로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등이 유명하고, 어휘 수집에 관한 것으로는 이성지의 재물보,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다. 이들 연구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 즉 문화적 자아 의식의 발현이었다.

문화 의식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의 성격을 띤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일찍이,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문화의 각 영역을 항목별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18, 19세기에는 이러한 학풍이 한층 발전하여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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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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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역사적 의의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의 연구는 성리학적 질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실학자들의 학문 영역은 매우 넓어져서 정치, 경제, 과학, 철학, 지리, 역사 등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리고 실학은 성리학의 폐단과 조선 후기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현실 개혁의 사상이었다. 그러한 실학 사상은 비록 실천적 측면에서 한계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몇 가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실학에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담겨 있었다. 당시의 성리학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서, 거기에서는 우리의 문화가 중국 문화의 일부로밖에 인식되지 않았으나, 실학자들은 우리 문화에 대한 독자적 인식을 강조하였다.

둘째, 실학에는 근대 지향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실학자들은 사회 체제의 개혁,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근대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셋째, 실학은 피지배층의 처지를 대변하고 옹호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이 봉건적 지배층의 지도 원리였다면, 실학은 피지배층의 편에서 제기된 개혁론이었다. 실학자들은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층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학은 대체로 정치적 실권과 거리가 먼 몰락 지식인층의 개혁론이었고, 또 이를 지지해 줄 만한 광범한 사회적 토대가 미약하였다. 따라서, 실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의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지 못하였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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