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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선 대원군의 정치

전제 왕권의 강화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국왕의 생부인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횡포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시정배와 어울리면서 서민층의 고통을 체험한 야심 만만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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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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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으로는 외척의 세도에 의한 국정의 혼란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민생의 파탄으로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조선으로 몰려오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내적으로는 외척의 세도를 제거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면서 왕권 강화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거세게 밀어 닥치는 외세의 침투를 물리치기 위해 쇄국 정책을 강행하였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로 권세를 누려 온 안동 김씨 일족을 정계에서 밀어 내고,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붕당 정치와 세도 정치의 폐단을 제거하면서 그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국가 재정을 좀먹고, 붕당의 근거지로서 백성을 수탈해 온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600여 개소의 서원을 철폐하고 47개소만을 남겼다. 이러한 시책은, 서원에 딸린 전지와 노비를 줄여서 양반층의 경제력과 그 세력 기반을 약화시켜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확보하고, 백성에게도 이익을 주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서원 철폐는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대원군은 과감하게 이를 관철시켰다.

또, 대원군은 실추된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는 막대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당백전을 남발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의 묘지림까지도 벌목하고, 많은 백성들을 토목 공사장에 징발하여 양반과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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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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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토지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을 찾아 내어 토호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부분적이기는 하나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또, 종래 상민에게서만 징수해 오던 군포를 양반에게서도 징수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였고,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한편, 대원군은 서세 동점에 따른 서양 선박의 출몰에 대응하여 군제 개혁, 군비 강화 등 국방 대책에 적극성을 띠었다. 문무 고관의 합의체로서 정무를 총괄해 오던 비변사에 대신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켰으며, 삼군부를 부활하여 국방 관계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전회통과 육전조례를 편찬하는 등 각종의 법전을 정비하게 하였다. 이러한 대원군의 왕권 강화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양반 지배층의 부당한 억압과 수탈을 약화시켜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쇄국 정책과 양요

18세기부터 탐험과 측량을 구실로 우리 나라에 접근해 온 서양 세력은, 19세기 이후로는 조선에 직접 통상을 요구해 왔다. 특히,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선박의 빈번한 출몰과 통상 요구,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사건과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은 조선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안으로는 대원군이 집권하기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잠입, 선교 활동을 하여 천주교 신자가 점차로 늘어났고, 의주, 동래 등지를 통하여 서양 상품이 불법 유입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한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고, 서양 상품의 유입을 엄금하였다.

한편, 유교적 전통 윤리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몇 차례의 탄압을 받았던 천주교는, 이 무렵에 프랑스 신부의 활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신도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여, 프랑스 선교사의 알선으로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때마침 청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이 전해졌고,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도 있어서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병인박해라 불리는 이 탄압으로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수천 명의 신도들이 처형당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선교사의 처형을 구실로 침략을 해 왔다. 즉, 프랑스는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강화읍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굳은 항전 의지와 한성근, 양헌수 부대의 분전으로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는데, 이를 병인양요라고 한다(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주민과 충돌하여 불타 침몰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구실로 미국의 로저스(Rodgers) 제독은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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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의 미국 군함 알래스카 호
신미양요 때의 미국 군함 알래스카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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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래 국방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내침하자 즉시,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광성보와 갑곶 등지에서 이를 격퇴시켰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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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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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격퇴한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의 쇄국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가로막아 근대화에 뒤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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