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의 형성과 활동
개화 사상의 선각자인 박규수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김윤식, 유길준 등 개화 주장자들이 점차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개화파를 이루었다. 개화파는 1880년대에 들어, 정계에 진출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고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개화파에는 개화의 방법론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정치가들이라고 할 만한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은 민씨 정권과 결탁하여 청의 양무 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는데, 이들을 온건 개화파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소장파 관료들은 청의 내정 간섭과 청에 의존하는 정부의 사대 정책에 반발하였고, 더욱이 청의 간섭에 의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이 원만하게 추진되지 못하는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급진 개화파 또는 개화당이라고 하는 이들은, 청의 간섭을 물리쳐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 요인들은, 박규수가 죽은 뒤에 중인 출신으로 개화 사상의 선각자였던 유홍기의 지도를 받았다. 또, 자신들이 직접 일본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고 세계 대세를 파악함으로써 근대적 국정 개혁의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개화당의 활동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임오군란 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 때 김옥균, 서광범 등도 그와 동행하였다. 이들 개화당 요인들은 해박한 개화 지식과 넓은 해외 견문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아 여러 가지의 개화 시책을 실천해 갔다. 예컨대,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 순보를 간행하였고, 군사와 학술 등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근대적인 우편 사업을 위하여 우정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은 일본의 태도가 냉담하여, 개화 운동을 위한 차관 도입에 실패함으로써 정치 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졌고, 민씨 일파에 의한 친청 수구 정책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서 그들의 개화 운동을 뜻대로 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갑신정변과 그 영향
임오군란 이후, 민씨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친청 수구 세력은, 그들에 반대하는 개화당을 탄압하였다. 친청 수구 세력의 압박으로 개화 정책의 추진은 물론, 자신들의 신변의 위험마저 느끼게 된 개화당 요인들은,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철저한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비상 수단을 도모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 조선 주둔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개화당 요인들은 정변을 계획하였다. 개화당은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일본 공사의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수구 사대당 요인들을 살해하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뒤, 14개조의 개혁 요강을 마련하였다(1884). 그 내용은, 청에 대한 사대 관계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지조법(地租法)의 개혁,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 제도의 실시 등이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개혁 요강
1. 청에 잡혀 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도의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갑신정변 후,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보상금 지불과 공사관 신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의 철수와,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에 상대국에 미리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국과 동등하게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었다.
갑신정변은 개화당의 세력 기반이 약했고, 청이 무력으로 간섭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청국의 내정 간섭이 더욱 강화되고, 보수 세력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개화 세력이 도태되어 상당 기간 동안 개화 운동의 흐름이 단절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갑신정변은 조선의 자주와 개화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정치면에서는,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는 정치 개혁을 최초로 시도했으며, 사회면에서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여 봉건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곧,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고, 역사 발전에 합치되는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의 선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