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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근대 교육과 국학 연구

(2) 근대 교육과 국학 연구

근대 교육의 발전

근대 교육은 개화 운동의 일환으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덕원 주민들은 개화파 인물들의 권유에 의하여 원산 학사(元山學舍)를 세워 근대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다. 같은 시기에 정부는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 강습 기관을 세워 영어를 가르쳤다. 그 후,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우고,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상류층의 자제들을 뽑아 영어를 비롯한 수학, 지리학, 정치학 등 각종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다.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교육 제도가 마련되었고, 이어서 국가의 부강이 국민의 교육에 있다는 내용의 교육 입국 조서가 반포되었다. 교육 입국의 정신에 따라 정부는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를 세웠다. 한편,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하여, 배재 학당, 이화 학당, 경신 학교, 정신 여학교, 숭실 학교 등 여러 사립 학교가 설립되어 근대 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들 근대 학교에서는 근대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 의식을 깨우쳐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05년 이후, 자주 국권을 수호하려는 애국 계몽 운동을 추진한 민족 운동가들은, 근대 교육이 민족 운동의 기반이며 본질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오산 학교, 대성 학교, 보성 학교, 진명 여학교, 숙명 여학교 등 많은 사립 학교가 곳곳에 세워졌다.

대한 제국 말기에 근대 학교 설립에 의한 민족주의 교육이 크게 발흥한 데에는, 신민회 등 정치⋅사회 단체와 서북 학회, 호남 학회, 기호 흥학회, 교남 교육회, 관동 학회 등 많은 학회의 교육 구국 운동이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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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교육 장면
신식 교육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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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연구의 진전

국학 연구는 실학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실학파의 민족 의식과 근대 지향 의식은 개화 사상으로 연결되어, 대한 제국 말기의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침탈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려는 국민들의 자각은, 국사와 국어를 연구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국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먼저, 국사 분야에 있어서는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이 근대 계몽 사학을 성립시켰다. 이들 계몽 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상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승리한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직면한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외국의 건국 영웅이나 독립 운동, 혁명 운동의 역사를 번역, 소개하여, 국민들의 독립 의지와 역사 의식을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편, 최남선은 박은식과 함께 조선 광문회를 만들어 민족 고전을 정리, 간행하였다.

근대 의식과 민족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국어에 대한 관심도 새로워졌다. 갑오개혁 이후, 관립 학교의 설립과 함께 국⋅한문 혼용의 교과서가 간행되면서 국⋅한문체 또는 국문체의 문장이 보급되어 갔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새로운 국⋅한문체의 보급에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독립 신문과 제국 신문은 한글을 전용하였고, 그 밖의 여러 신문에서 국문과 한문을 혼용함으로써 전통적인 한문체를 탈피하는 획기적인 문체의 변혁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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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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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문체의 변화에 따라 우리말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국어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특히, 지석영, 주시경 등은 국문 연구소를 설립하여 국문의 정리와 국어의 새로운 이해 체계 확립에 이바지하였다.

국학 운동은 일제의 보호국 체제라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던만큼, 학문적인 깊이에 있어서는 일정한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애국 계몽 운동의 노선에 따라, 사회 일반에 근대 의식과 민족 의식을 심어 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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