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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독립 전쟁
  • (1)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1)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3⋅1 운동의 결과로 우리의 임시 정부가 탄생하였다. 당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상호 연락을 취하지 못하여 여러 지역에서 각각 별개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국내의 한성 정부,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 만주의 군정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 민족을 이끌고 보다 강력한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단일 정부가 필요하였다. 이에, 각지의 민족 지도자들은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면서, 상하이에 정통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대한 민국 임시 정부였다(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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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 청사(1919)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청사(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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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의 헌정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임시 헌법을 갖추어 출범하였다. 즉,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 사법 기관인 법원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정체의 정부였다.

대한 민국 임시 헌장 선포문

신인 일치(神人一致)로 중외 협응(中外協應)하야 한성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 완전한 자주 독립의 복리로 아(我) 자손 여민(子孫黎民)에 세전하기 위하여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로 임시 헌장을 선포하노라.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헌정 지도 체제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5차에 걸친 개헌 과정을 통하여 다듬어졌다.1) 임시 정부의 제1차 개헌(1919. 9. 11.)에서는 국무원, 임시 의정원, 법원의 3권 분립 체제를 갖추었으나, 망명지에서 사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제2차 개헌(1925. 4. 7.)부터는 법원에 관한 조항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5차 개헌(1944. 4. 22.)에서는 심판원의 규정을 두어 사법권에 관한 조항을 다시 살렸다.

제1차 개헌은 대통령 지도제로서, 대통령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불합리한 점이 있어, 6년 만에 제2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 지도제로 전환하였다가, 2년 뒤에 제3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위원 중심제로 바꾸었다. 그 뒤, 제4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주석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가(1940), 제5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 부주석 중심 체제가 수립되어 광복 때까지 계속되었다.

광복 운동의 전개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제 정부로서, 국내외의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임시 정부는 그 초기에, 전체 독립 운동가들의 동조를 얻지 못하여, 국민 대표 회의가 소집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더구나,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로 전전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의 노력에 의해 조직이 정비, 유지되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에 의해 전국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 등을 두어, 한민족은 누구나 이 조직을 통하여 독립 운동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국내의 한국인은 이 조직을 통하여 임시 정부와 연락할 수 있었고, 군자금도 전달할 수 있었다.

군자금은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임시 정부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또, 애국 공채의 발행으로 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각지에서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립군에 전달되어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리고 임시 정부는 교통국의 통신망을 통하여 국내외와 연락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시 정부는 파리에서 신한 청년당원으로 외교 활동을 하던 김규식을 외교 총장으로 임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또, 국제 연맹과 워싱턴 회의에 우리 민족의 독립 열망을 전달하는 운동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였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서 독립 신문을 간행,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의 사료집을 간행함으로써, 안으로는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밖으로는 한국의 자주성과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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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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