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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통일 신라의 전제 왕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그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대외 관계가 안정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그런데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무열왕은 김유신의 후원을 받아 진골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고, 백제,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 때의 전제 왕권 확립은 이후 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1) 삼국사기에는 태종 무열왕 이후 혜공왕에 이르는 120여 년 간의 시기를 중대라 하여 그 이전의 상대, 이후의 하대와 구별하고 있다.

한편, 통일을 전후하여 유교 정치 이념이 도입되고, 중앙 집권적 관료 정치가 발달하였으며, 왕실의 권위가 높아짐으로써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문무왕 때의 통일 왕국 형성, 그리고 신문왕 때의 귀족 세력 숙청은 전제 왕권의 확립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성덕왕 때에 이르러 신라의 전제 왕권은 안정되었는데, 이 때에 제작된 만파식적은 왕실의 번영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왕권에 눌려 약화되었다. 이에 비하여, 6두품은 신분상의 제약으로 높은 관직을 받을 수 없었지만,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로서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신라 하대 사회의 동요

무열왕 직계 자손들의 전제 왕권은, 경덕왕 때에 오면서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을 받아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던 김유신계 후손들도 몰락하여 갔다. 그런 가운데 경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혜공왕 때에 다시 그 이전의 상황으로 복구되었다.

아울러 혜공왕 때에 와서는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고, 그런 와중에서 왕이 피살되면서 마침내 전제 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대 약 150여 년 간 신라 조정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어 왕이 자주 교체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김경신과 김주원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는데, 이 때 승리한 김경신이 왕위에 올라 원성왕이 된 반면, 김주원은 중앙에 있지 못하고 지방의 연고지인 강릉으로 퇴거하여 지방 호족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손자인 범문도 난을 일으키다가 제거되었다. 이후에도 지방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진성 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더욱 문란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잇단 천재 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로 전락하거나, 각처에서 초적이 되어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저항하였다. 이 때 최치원 등 6두품 지식인들은 신라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수립을 시도하였지만, 중앙 진골 귀족들에 의해 탄압당하거나 배척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능력 중심의 과거 제도와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중앙 진골 귀족들은 아직도 골품 제도에 집착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의 불교나 화랑도에서 항상 강조해 오던 국가 정신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과중한 수취가 농촌 사회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으므로,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지방 세력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후 신라 하대 사회는 호족들에 의하여 움직여 갔다. 호족들은 군 단위의 지방을 다스리면서 성주나 장군으로 자처하였다. 또, 해상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군사적 기반까지 마련한 군진 세력도 등장하였다.

발해의 성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고구려의 옛 땅에서는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마침내 발해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특히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인들은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당은 그 곳의 고구려 유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임명하는 등의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당의 이와 같은 민족 분열 정책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에게 동족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구려의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698). 이것이 곧 발해이다. 그리하여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가 함께 발전한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의 영역에는 고구려인 이외에, 원래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써 발해의 주민은 지배층을 형성한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의 말갈족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발해가 외국에 파견한 사신에는 고씨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고구려계의 인물이다. 또, 피지배층인 말갈인 중에서 지배층으로 상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인을 주축으로 성립된 나라였던만큼, 고구려 계승 의식이 분명하였다. 이 점은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발해의 발전

발해는 건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에 걸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특히, 무왕 때에는 동쪽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당과 대결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국가 기반을 확실히 하였다. 당시의 발해 형세에 대하여 중국의 역사책에서는 “동북 지방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발해는 초기에 당과의 대결을 통한 영역의 확보에 주력하였지만, 문왕 때에는 대대적으로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 당과 친교 관계를 유지하고 중국 문화를 수입하여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이동한 것도 지배 체제의 정비, 발전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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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상경 용천부 터(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의 상경 용천부 터(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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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 이르러 발해는 크게 융성하였다. 이 무렵, 발해는 북쪽에 있는 여러 부족을 병합하여 그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고,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로 인하여 발해는 해동 성국이라는 칭호를 듣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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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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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안, 대흥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를 나타낸 것이며,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대함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료 조직의 성격 및 왕위 계승에서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던 사실과 관련하여 볼 때, 발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대외 관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처음에는 당과의 무력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8세기 초에 발해가 국력을 떨치며 영토를 확장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당은 흑수부 말갈족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발해는 흑수부를 치는 한편, 장문휴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산둥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발해는 당과 신라의 공격을 양면으로 받았지만, 이를 격퇴하면서 국가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발해와 당의 적대 관계는 8세기 후반 이후 친선 관계로 바뀌었고, 이후 발해는 당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으며, 많은 유학생들이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당의 문물이 수입되고, 무역도 매우 활발해졌다.

발해는 당, 신라의 협공으로 인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신라와는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대립 관계는 당을 사이에 두고 문화적인 우월 경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당의 견제 정책에 의하여 이 같은 상황은 더욱 조장되었다. 즉, 당에 간 발해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상석에 앉기를 다투거나, 빈공과의 합격자 서열을 문제삼음으로써, 두 나라 간의 경쟁은 격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발해와 신라는 사신을 교환하였고, 무역을 하였으며, 발해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에는 신라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발해에서 신라로 왕래하던 신라도는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와 같이, 만주 지역에서 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던 발해는 10세기 초에 국력이 약화되면서 거란족에게 멸망되었다(926). 이 때 발해의 왕자인 대광현 등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들어왔으며,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은 대개 고려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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