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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치 체제의 확립

(1) 정치 체제의 확립

집권 체제의 정비

새 왕조의 기틀은, 태조 때 개국 공신인 정도전에 의해 다져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저술하여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새 왕조는 통치 질서의 정비와 함께 국호를 조선으로 고쳐 고조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도읍을 교통과 국방의 요지인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군사 체제를 정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태종 때에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면서 관제의 개혁, 사원전과 사원 노비의 제한, 양전 사업 실시, 호패법의 시행, 사병(私兵) 제도의 폐지, 신문고 설치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 때에는 황희, 맹사성 등의 청렴한 재상을 중용하였으며, 집현전을 왕립 학술 기관으로 육성하였다. 그리고 유학자들을 우대하여 유교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이에 왕조와 민생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국토가 확장되어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또, 한글의 창제로 민족 문화가 꽃피었다.

세종, 문종에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정치 기강이 흔들리고 양반 관료의 귀족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을 다시 강화하였으며, 조정의 권신과 지방 세력을 억제하면서 중앙 집권 정책과 부국 강병 정책을 추진하였다.

성종 때에는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 집권 체제가 정비되고 유교적 법치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유교적 통치 이념

조선 왕조는 정치적으로는 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 왕도 정치는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서, 사회 질서를 중시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와 가족 제도에 종법 사상이 응용되었다. 즉, 신분적으로 양천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이에 따른 직역을 법제화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 원리가 점차 보편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의 농민 지배를 허용하는 사회 경제 관계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지배층이 농업 경영에 참여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경제 관계에서도 작용하였다.

국제 관계에서는 평화 추구의 친선 정책을 기본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제적 긴장 관계를 완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적 생활까지도 유교 사상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 고려 이래 사회 관습상의 잔재로 이상적인 유교 이론을 수용하는 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서민 사회에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 등이 그대로 잔존하였다.

중앙의 정치 조직

유교적 통치 이념은 정치 구조에 반영되어 동⋅서 양반의 균형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가 지향하는 정치 구조를 법제화한 것이다.

중앙의 기본적 정치 구조는 의정부와 6조 체계로 편성되었다. 의정부는 최고의 관부로서, 재상들의 합의를 통하여 국정을 총괄하였다. 6조는 직능에 따라 행정을 분담하였다. 이것은 행정의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킨 것이다.

행정 분야와는 다르게 간쟁권을 가진 언관으로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3사가 있었다.

사간원, 사헌부는 양사 또는 대간이라 불렀는데, 간쟁과 감찰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대간은 서경권을 가지고 있어 관리 임명에 신분, 경력 등을 조사하여 그 승인에 간여하였다. 홍문관은 유교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정책 결정에 자문하였다.

한편,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하여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왕권의 강화와 유지를 위한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 밖에, 역사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과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가 있었다.

또, 학식 있는 신하들이 국왕과 만나 자연스럽게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를 두었다.

지방의 행정 조직

전국을 8도로 나누고, 8도에는 관찰사(감사)를 파견하였는데, 관찰사는 부, 목, 군, 현의 행정을 감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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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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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8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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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인 부사, 목사, 군수, 현령(현감)은 왕에 의하여 임명되어, 백성들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였다.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지방 행정 단위에는 중앙의 6조에 상응하는 6방의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사무는 토착의 향리들이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담당하였다.

군현 아래에는 면, 리, 통을 두고, 향촌 주민 중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여 수령의 정령을 집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권이 향촌의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한편, 새 왕조를 개창한 신진 사대부는 이제까지 군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향리를 배제하고, 양반 중심의 향촌 사회를 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사심관 제도는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 발전하게 되었다. 즉, 향촌의 덕망 있는 인사들이 유향소를 구성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면서, 지방 행정에 참여하였다. 또, 초기부터 경재소를 수도에 두어,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맡게 함으로써 정부와 향촌을 연결시키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향촌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중앙 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된 것은, 백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커진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백성이 지방 세력가의 임의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 고려 시대에 광범하게 존재하였던 속현과 특수 행정 단위인 향, 소, 부곡이 점차 소멸되고, 인구의 증가와 자연 촌락의 성장에 따라 면⋅리 제도가 정착되어 간 것도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 조직을 강화하여 국방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군역은 양인 개병과 농병 일치를 원칙으로 하였다. 즉, 16세 이상 60세에 이르는 양인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져서,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 되거나 군인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이 되어야 하였다. 그것은 양인인 농민이 자유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였다. 노비는 권리가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군역의 의무가 없었으나, 필요에 따라서는 특수군으로 편제되기도 하였다.

군인은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5위를 기간 부대로 하는 중앙군은 궁궐의 수비와 수도의 방비를 담당하였다. 중앙군은 정군을 비롯하여, 시험에 의하여 선발된 사람, 왕족과 공신, 고급 관료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고급 군인으로서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건국 초기에는 국방상의 요지인 영⋅진에 나아가 복무하였고, 그 일부는 교대로 수도에서 복무하였다. 그리고 세조 이후로는 전국의 군현을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편성하는 진관 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였다. 지방군은 의무 병역으로 징발된 정병들이지만,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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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군사 조직
조선 시대의 군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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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규군 이외에 잡색군(雜色軍)이라는 일종의 예비군이 있었다. 잡색군은 전직 관료, 서리, 향리, 교생, 노비 등 각계 각층의 장정들로 조직되어, 평상시에는 본업에 종사하면서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아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개병제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져서, 세종과 세조 때에는 정규군이 15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였으며, 보인과 잡색군을 합하면 모두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의 군사력이 있었다.

한편,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역 대상자를 조사, 등록시키는 호적 제도와 호패 제도를 강화하였다. 쓰시마 섬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방력의 증강에 힘입은 것이다.

교통과 통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교통과 통신 체제의 효율적 운영이 요구되었다. 이에 육로는 역원제, 수로는 강과 바다에서 선박을 이용하는 조운제, 국방상의 위기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한 봉수제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농업 위주의 정책으로 상업이 부진하여 도시와 도로가 발달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지방 관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행정 도시의 경우도 도로가 협소하였다. 교통 수단은 주로 마필과 가마였다. 화물 운송 수단으로 육로에는 우마가 끄는 수레가, 수로에는 판선(목선)이 이용되었다. 현물로 징수한 세미의 수송은 수로를 이용하였는데, 하천과 해안 요지의 조창에서 이를 모아 중앙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교통⋅통신 기관으로는 역과 원이 있었다. 전국의 주요 도로에는 500여 개의 역이 있었다. 역에는 역마를 두어, 관청의 공문 전달과 공납물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공무 여행자에게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마패가 발급되었다. 고급 관리는 지방 관아에 부설된 객사를 이용하였고, 일반인은 주막을 이용하였다.

교육과 과거 제도

유교 이념에 기초한 조선 왕조는 교육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하였다.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 학문의 심화를 위해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계시켰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 정도였으나, 16세기 이후로 정원 외의 학생이 증가해 갔다. 학생들은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있는 서당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히거나, 4학이나 향교에 진학하여 소과에 응시하였으며, 합격자는 생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었다. 성균관 유생 및 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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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대성전(서울 성균관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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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전북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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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문과, 무과, 그리고 특정한 기술을 시험하는 잡과의 세 분야로 나뉘었다.

문과 지망자는 원칙적으로 생원, 진사 시험을 거쳐서 성균관에 입학한 다음, 다시 대과인 문과에 합격해야 요직으로 나갈 수 있었다.1) 관리가 요직으로 나가거나 빠른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하였다. 비록,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교육의 기회가 양반에게 거의 독점되다시피 했으므로, 일반 양인층이 합격하는 예는 많지 않았다.

무과 지망자는 무예 시험을 거쳐 무과에 합격해야만 높이 등용되었다. 무과의 실시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분야가 있어서 사역원, 형조,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관서의 특수 기술관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기술학의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맡았다. 무과와 잡과 응시자에는 서얼과 중간 계층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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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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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인 취재를 거쳐서 하급 관리로 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과거는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수시로 행해졌다. 또, 학덕에 의한 천거로 관료에 임용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문음에 의해 특별히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출판 문화의 발달로 서적이 많이 보급되어 가정이나 서당에서의 초등 교육이 쉬워졌고, 16세기 이후로는 관학 외에 서당의 보급과 함께 서원이 설립되면서 교육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이와 같은 교육의 발전은 과거 제도의 정비와 함께 조선 왕조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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