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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제도의 개편과 정치 변화
  • (2) 정국의 변화와 탕평책

(2) 정국의 변화와 탕평책

붕당 정치의 전개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속에서 위정자들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통치 질서를 개편하고 수취 체제를 조정하여 당면한 위기에서 우선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붕당 정치를 통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강화하고자 하였다.

붕당 정치는 사림의 집권과 더불어 모색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국왕이 주재하였다. 그런데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림들은 붕당을 조성하여 정치 질서를 개편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에 의거하여 왕도 정치를 추구하고, 서원, 향약의 보급을 통해 향촌 사회에서 세력 기반을 구축하여 붕당 정치의 토대를 굳히고자 하였다.

붕당의 조성은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파되면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에는 대체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 후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주전론을 내세웠던 북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이후의 정국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서인 정권은 전제와 독주를 스스로 경계하고 남인의 진출을 허용하여 비판 세력을 공존하게 하는 붕당 정치를 추구하였다. 서인들의 이러한 정책은, 정치적 실권 장악을 합리화하고, 아울러 사회 모순이 크게 드러나고 있던 당시의 사회 변동을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지배층의 결속에서 찾으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 서인들은 정치 권력의 기반으로 병권을 중요시하여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의 군영을 새로이 설치하고 그 통솔권을 장악하였다.

정치 세력이 붕당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상대방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정치가 운영되면서 17세기 중엽까지는 정국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정치적 입지를 굳힌 지배층은 중앙 정계에서는 양반 관료로서 성리학적 명분을 통하여 정치를 주도하였고, 향촌의 사림들은 경제적 토대인 지주제를 확대시켜 가면서 향안, 향약, 서원 등을 통하여 동요하고 있던 향촌 질서를 재확립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은 당시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던 농촌 사회의 어려움에도 주목하여 잘못된 조세 체계를 시정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모색된 것이 아니었고, 더구나 당시 가장 큰 문제였던 지주 전호제의 폐단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붕당 정치의 변질

양반 지배 세력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데에 그 의도가 있었던 붕당 정치는 붕당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면서 변질되어 갔다. 서인들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추진한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비판하면서, 예송 논쟁(禮訟論爭)1) 예의가 기본적 규범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예송 논쟁은 붕당 정치의 필연적 결과였다. 즉, 예송 논쟁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서, 1659년의 기해예송과 1674년의 갑인예송이 대표적이다. 이 논쟁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정통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싸움이었다. 기해예송에서는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갑인예송에서는 정통성을 인정하였다.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예송 논쟁에서 처음에는 서인, 뒤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남인이 집권하였다. 이 때까지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졌다.

그러나 이른바 경신환국에 의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 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즉, 이 때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이 재기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부터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 붕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히 행해졌고, 외척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져 갔으며,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미치는 등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은 일부 벌열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공론에 의해 문제를 처리하기보다는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또, 양반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양반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갔다.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양반층은 자기 도태를 거듭하였다.

그런데 붕당 정치의 변질은 겉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공존 관계가 깨진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17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원인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전란으로 황폐되었던 농경지도 거의 복구되었고, 농법의 개량으로 생산력도 높아졌다. 그리고 장시의 발달과 화폐의 전국적인 유통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지배 세력을 떠받쳐 왔던 지주제와 신분제를 동요시켰다. 지주제와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양반들의 향촌 지배가 쉽지 않았고, 그것은 나아가 붕당 정치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지배 체제가 동요하자, 향촌의 농민들은 두레나 촌계(村契)를 중심으로 자체 결속력을 강화해 가면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였다.

탕평론의 대두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극단적인 정쟁과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자, 붕당끼리의 세력 균형 위에서 안정될 수 있었던 왕권 자체가 불안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탕평론(蕩平論)이 제기되었다.

탕평론의 본질은 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함에 있었다. 정치적 균형 관계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각 붕당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권에 의해 타율적으로 중재되어야 하였다. 17세기 초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 관계를 이룬 것은 전자의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오히려 후자의 방안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탕평론은 국왕에 의해 주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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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서울 성균관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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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론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숙종에 의해서였다. 이 때에는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노론이 보수적이라면 소론은 진보적이었다. 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숙종은 그 해결책으로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즉, 군왕과 신하가 한 마음으로 절의와 덕행을 숭상하면서 인사 관리를 공정하게 한다면,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론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예컨대, 공평을 내세운 그 자신이 인사 정책에서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의 조처가 계속된 것은 그의 탕평론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숙종 말년부터는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진되면서부터는 탕평론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

영조가 초기에 시도한 탕평책도 숙종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조 스스로가 소론을 내몰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편당적인 조처를 취해 정국의 불안만을 조성하였다. 붕당의 세력이 비대해진 정국에서 기반이 약한 왕권으로 정국의 수습을 모색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였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힘은 강력한 왕권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일련의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인 이른바 탕평파를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로써, 치열하던 정쟁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정국이 안정된 가운데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역의 폐단이 다소 시정되었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가 부활되었으며,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이 편찬되는 등 문물이 재정비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이후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에 의해 변란이 자주 일어나면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다.

정조의 탕평책

노론은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다. 정조는 벽파의 압력 속에서 세손 때부터 그 지위가 불안하였는데, 즉위 후 벽파를 물리치고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탕평책을 내세워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규장각을 두어 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하였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국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진보적 학자들을 모아 붕당의 비대화를 막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정치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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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서고(서울 대학교)
규장각 서고(서울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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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조는 문물의 정비에도 힘써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 왕정을 과시한 정조였지만, 그도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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