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제도의 개편과 정치 변화
  • (3) 정치 질서의 파탄

(3) 정치 질서의 파탄

세도 정치의 전개

탕평책이 추구된 18세기에는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사회⋅경제적 변동이 더욱 심화되어 계층 간의 대립과 마찰 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항조, 거세, 민란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은 때로는 정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위정자로서는 정국의 안정과 아울러 동요하는 서민 사회도 역시 안정시켜야 하였다.

그러나 탕평책은 정국의 안정에는 어느 정도 기여하였지만,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외척 가문이 국정을 독점하여 이른바 세도 정치를 펴면서 그 동안 겨우 유지되어 오던 지배 체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세도 정치란, 종래의 일당 전제마저 거부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로서, 정권의 사회적 기반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한 가문의 사익을 위해 정국이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 질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갑자기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왕의 후견인이 되었다. 김조순은 딸을 왕비로 들임으로써 그의 정치적 기반을 한층 더 굳히고, 그 일가인 안동 김씨에게 정부의 요직을 안배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외척인 풍양 조씨 가문이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왕족이라도 세도 가문에 눌려서 살아야 했고, 세도 가문에 적대되는 세력은 그 어떤 존재도 용납되지 않았다.

왕정과 왕권은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간에 걸친 세도 정치하에서 명목에 지나지 않았고, 왕도 정치라는 것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세도 가문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고 있던 비변사를 거의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권력을 행사하였고, 훈련도감 등의 군권도 장기적으로 독점하여 정권 유지의 토대를 확고히 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왕권을 정치에서 배제시킨 세도 정치는, 정치적 견제 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부도덕성을 철저하게 드러내었다. 자연히 부정과 부패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도가들의 파행적 정치 행태는 인사 관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 시대에 관료가 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는 과거제에 있었다. 그런데 세도 정치하에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지면서 시험장에서의 부정, 합격자의 남발 등 온갖 비리가 성행하였다. 과거제의 문란과 함께 관직의 매매도 성행하였다. 세도 가문은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공공연히 관직을 팔았다. 관료들은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세도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관직을 산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축재에 열을 올렸다. 특히, 수령직의 매매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관직 매수에 들인 돈을 벌충했으며, 이와 같은 관료들의 부정에 편승하여 아전들의 농간 또한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탐관 오리들은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어들였으며, 무고한 백성을 잡아다가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한 다음에야 풀어 주기도 하였다.

농민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새로이 성장한 상공업자들도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잉여 생산물의 거의 모두를 빼앗기는 실정에서 지금까지 비교적 순조로운 성장을 보였던 상품 화폐 경제도 이 시기에는 그 성장이 둔화되었다. 사회적 압제, 경제적 수탈, 사상적 경색 등의 상황이 정치적 문란과 어울어지는 속에서 세도 정권은 역사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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