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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독립 운동의 전개
  •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임시 정부의 수립

3⋅1 운동에서 독립을 선포한 우리 민족은 그 결실을 맺기 위하여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상호 연락의 어려움으로 단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여러 지역에서 각각 별개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국내에서는 13도 국민 대표 명의로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 총리로 하는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상하이에서는 민주 공화제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을 국무 총리로 추대하였다.

한편, 연해주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 국민 의회가 조직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 민국 임시 정부, 신한 민국 정부 등이 있었으나, 이 정부들은 실제적인 정부 부서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여러 개의 정부가 각지에 수립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이들을 통합하여 단일 정부를 수립하고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 정부의 통합

정부 통합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즉,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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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 청사(1919)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청사(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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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통합한 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헌정 체제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하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헌정 지도 체제는, 정부 수립 이후 5차에 걸친 개헌 과정을 통하여 다듬어졌다.1) 임시 정부의 제1차 개헌(1919.9.11.)에서는 국무원, 임시 의정원, 법원의 3권 분립 체제를 갖추었으나, 망명지에서 사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제2차 개헌(1925.4.7.)부터는 법원에 관한 조항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제5차 개헌(1944.4.22.)에서는 심판원의 규정을 두어 사법부에 관한 조항을 다시 살렸다.

제1차 개헌은 대통령 지도 체제로서 대통령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불합리한 점이 있어, 6년 만에 제2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가 2년 뒤에는 제3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 위원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바꾸었다. 그 뒤 제4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가, 임시 정부가 본격적인 대일 항전 체제를 갖추고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의 기운이 조성되어 가자 다시 제5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부주석의 지도 체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의 활동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는 민족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갔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이 조국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국가 건설의 방략을 제시하여 주었다.

임시 정부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로 전전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김구 등의 노력에 의해 조직이 정비, 유지되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누구나 이들 조직을 통하여 독립 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고, 국내에서 임시 정부와 연락할 수 있었다.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였다. 임시 정부는 이 자금을 애국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마련된 자금은 임시 정부의 활동비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 운동가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임시 정부는 수립 직후 각종 군사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영토 내에서 직접 군사 활동을 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상하이에 육군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 전쟁을 수행할 초급 지휘관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독립군을 임시 정부 직할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육군 주만 참의부 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가 직접 무장 부대를 편성하여 항전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것은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이후였다.

한편, 임시 정부는 파리에서 신한 청년 당원으로 외교 활동을 하던 김규식을 외교 총장으로 임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또, 국제 연맹과 워싱턴 회의에 우리 민족의 독립 열망을 전달하게 하였으며,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도록 함으로써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의 사료집을 간행함으로써, 안으로는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밖으로는 한국의 자주성과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켰다.

한인 애국단의 활약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자금과 인력의 부족으로 임시 정부의 활동은 점차 침체되어 갔다. 더욱이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획기적인 방안이 있어야 했다. 이에 임시 정부의 김구는 강력한 항일 무력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한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을 방안을 실행에 옮겼다.

그 첫 번째의 거사가 이봉창에 의한 일본 국왕 폭살 기도 사건이었다. 이 의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을 주고 일제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이른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침략 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자 한인 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을 보내어 식장을 폭파하게 하였다. 윤봉길은 폭탄을 던져 단상에 있던 많은 일본군 장성과 고관들을 살상하였고, 이로 인하여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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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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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어 한국 독립 운동의 의기를 드높였으며, 특히 한국의 독립 운동에 냉담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감탄하였으며, 이후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정부가 중국 영토 내에서 우리 민족의 무장 독립 활동을 승인함으로써 한국 광복군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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