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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4. 사회⋅경제적 민족 운동
  • (2) 경제적 저항 운동의 전개

(2) 경제적 저항 운동의 전개

민족 기업의 육성

3⋅1 운동 이후, 민족 운동의 열기 속에서 민족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고조되어 갔다. 그러나 일제의 각종 규제로 민족 기업 활동은 큰 회사의 설립보다는 오히려 소규모 공장의 건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민족 기업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지주 출신의 기업인이 지주와 상인의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서민 출신의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새로운 기업 분야를 개척한 것이었다.

지주 출신의 기업을 대표하는 것은 경성 방직 주식 회사이고, 서민 출신의 기업을 대표하는 것은 평양 메리야스 공장이었다. 이들 민족 기업은 순수한 한국인만으로 운영되었으며, 한국인의 기호에 맞게 내구성이 강하고 무게 있는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한편, 금융업에도 한국인의 진출이 활발하였다. 3⋅1 운동 이후에 설립된 민족계 은행으로는 삼남 은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 식민 통치 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해체되거나, 일본인 기업에 흡수, 통합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족 기업 활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산 장려 운동

1920년대에 민족 기업이 점차 활기를 띠어 갈 때,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것이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었다.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전개된 물산 장려 운동은, 민족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민족 경제의 자립을 기하려는 민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처음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1922년 조만식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 지방의 사회계, 종교계, 교육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족시켰고, 그 이듬해 서울에서도 조직되었으며, 곧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회의 목적은 회칙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조선 물산을 장려하여 조선인의 산업 진흥을 도모하며, 조선인으로 하여금 경제상 자립을 얻게 함.”이었다. 당시 물산 장려 운동을 위해 각지에서 공모한 표어 가운데서 대표적인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우리는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을 보아도 이 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잘 알 수 있다.

물산 장려 운동은 일본 상품을 배격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것으로서,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또, 이 운동은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소비 절약이 필요하다고 보고, 근검 저축, 생활 개선, 금주⋅단연 운동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학생들 간에는 자작회 운동이 전개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활발하게 추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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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 장려 운동
물산 장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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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일제의 토지 수탈로 인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한 우리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에게 수확량의 50% 이상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온갖 세금과 비료 대금까지 부담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 농민들의 소작 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특히, 일본인 지주에 대항하여 일어난 소작 쟁의는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었으며, 더 나아가 일제의 수탈 행위에 항거하는 항일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소작 쟁의는 1919년 처음으로 발생한 이래 매년 증가하였다. 초기의 쟁의가 소작권 이전이나 고율 소작료에 대한 반대 투쟁이었음에 비하여 1930년대 이후의 쟁의는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격렬해져 갔다. 수많은 소작 쟁의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황해도 재령에서 일어난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농장에서의 소작 쟁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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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소작 쟁의 발생 건수(조선 소작 연보, 1938)
연도별 소작 쟁의 발생 건수(조선 소작 연보,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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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농민 조직은 조선 농민 총동맹의 결성이 효시였다(1927). 이후, 전국 각지에 수많은 농민 조합이 결성됨으로써 쟁의는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노동 운동

노동 운동은 주로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추진에 따른 가혹한 노동 조건 때문에 일어났다. 노동 쟁의는 값싼 임금 문제와 열악한 노동 조건이 주요 쟁점이었는데, 파업이 전개될 경우, 예외 없이 경찰이 개입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쟁의가 발생한 곳은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이었으므로, 쟁의는 반제⋅반일 투쟁으로서의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었다.

일제는 1930년대에 대륙 침략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군수 공업 시설을 확충하고, 지하 자원을 약탈하였으며,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는 한국 노동자의 임금을 더욱 인하하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였으며, 각종 부담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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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현장에서 혹사당하는 우리 동포
노동 현장에서 혹사당하는 우리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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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계속적인 파업이 발생하였고, 마침내 노동자들은 지하 조직을 갖춘 노동 조합을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노동 쟁의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노동 쟁의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천대를 받아 오던 백정들은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적으로는 권리를 인정받았으나, 사회적으로는 오랜 관습 속에서 계속 차별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백정들은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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