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4. 사회⋅경제적 민족 운동
  • (3)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3)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만주 이주 동포

우리 민족이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처음에는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순으로 궁핍하게 된 농민들이 생활 터전을 찾아 국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확고한 민족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많이 건너갔다.

이들은 지식 수준이 상당히 높았으며 경제적 여유도 있어 국권 회복 운동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이주 동포들은 현지 토착민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고, 수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일 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항일 운동을 준비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독립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나들면서 일본 군경과 치열한 항일전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중국 군벌의 이해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일본군 대부대가 만주로 출병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초토화하면서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에 의해 많은 동포들이 피살되었다(1920).

1930년대에 들어와 우리 동포들은 일제의 본격적인 대륙 침략으로 근거지를 상실하면서 갖은 수난을 당하여, 만주에 있던 무장 부대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연해주 이주 동포

러시아는 변방 개척을 위하여 처음에는 한국인의 연해주 이주를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기도 하여 이 곳 동포들의 삶은 만주 이주 동포보다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많은 동포들이 정착하게 되어 민족 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1905년 이후 이주 한인이 급증하여 여러 곳에 한인 집단촌이 형성되었으며, 많은 민족 단체들과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의병 운동에 호응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외 의병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이 곳에 연해주 의병의 통합체인 13도 의군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대한 광복군 정부를 결성하였으며, 3⋅1 운동 때에는 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하여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초에 시베리아 내전이 종식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금지하고 무장 해제를 강요함으로써 연해주에서의 민족 운동은 약화되었다. 1937년에는 연해주의 한인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어버렸다.

일본 이주 동포

19세기 말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은 학문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자, 생활 터전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산업 노동자로 취업함으로써 그 수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면서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고생을 해야 하였으며, 일본인의 민족 차별로 온갖 수모를 당해야 하였다.

1923년 일본 관동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명과 재산상에 큰 피해를 입어 일본 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 때 일본 당국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는 유언 비어를 퍼뜨려 사회 불안의 원인을 한국인의 탓으로 돌렸다. 이로 인해 재일 동포 6000여 명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미주 이주 동포

한인들의 미주 이민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이주민은 주로 남자들이었으며 농민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하와이로 이주하여 사탕수수 농장에 고용되었으며, 미국 서해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철도 공사장, 채소 농장 등에서 일하였다. 이들 이주민들은 값싼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더욱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한 사람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며 착취당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민족 의식이 투철하여 애국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 운동 자금을 거두어 국내로 송금하는 일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를 설립하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1910년에는 통합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 조야에 일제의 야만성을 폭로,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9년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각종 의연금을 거두어 임시 정부에 송금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외교 기관인 구미 위원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군사 활동도 전개하여 한인군을 편성하였고, 많은 한인 청년들이 미국군에 자원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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