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Ⅳ. 현대 사회의 발전
  • 3.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 (2) 5⋅16 군사 정변과 민주주의의 시련

(2) 5⋅16 군사 정변과 민주주의의 시련

5⋅16 군사 정변과 박정희 정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부 세력이 사회적인 무질서와 혼란을 구실로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출범하였던 장면 내각은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나게 되었다.

군사 정변을 일으킨 군부는 즉각 헌정을 중단시켰으며, 군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는 혁명 공약에서 반공을 국시로 천명하고 경제 재건과 사회 안정을 내걸었으며, 정치 활동 정화법을 제정하여 구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어서, 군사 정부는 새로운 정당으로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여기에 결집시켰다.

군사 정부는 헌법을 비롯해서 각종 법령을 개정, 정비하고, 민정을 복귀시키기로 약속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군사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주요 과제들을 대부분 그대로 실천하려 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의 권력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헌법에 의거하여 국정을 운용하였다. 조국 근대화의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우선적인 정책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은 공업화의 급속한 추진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외국으로부터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도입하였다.

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 회담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시민과 대학생들의 대일 굴욕 외교 반대에 부딪혀 이른바 6⋅3 시위를 유발시켰다(1964). 이에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에 참여한 시민과 대학생들을 억압하였다. 야당과 대학생들은 박정희 정부의 억압 통치에 반대하였으며, 여⋅야의 대립은 점차 골이 깊어 갔다. 특히, 1969년에는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이 강행되자, 여⋅야 국회 의원들 사이에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확대보기
6⋅3 시위
6⋅3 시위
팝업창 닫기

유신 체제의 등장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국제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고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켰으며, 그 뒤 베트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또,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의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최우선적인 과제로 내세우면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안정된 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장기 집권의 길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선포된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1972).

유신 체제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그것은 곧 국가 행정의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집약해서 사회를 조직화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활동을 제약한 독재 체제였다. 특히, 대통령의 개인적인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유신 체제는, 국가 행정의 효율성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의 권위주의적 경직성은 국민들의 정치 의식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신 체제는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서 역기능적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 결과 국내외로부터 격렬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학원, 언론, 종교, 정계 등 각 분야에서 민주 헌정의 회복과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를 막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 조치와 같은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였으며, 시위에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일본 등 우방 국가에서도 유신 체제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였으며, 이 때문에 한때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 마산 등지에서는 유신 체제에 반대하여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으며, 한편 집권 세력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는 10⋅26 사태가 일어나 유신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1979).

전두환 정부

10⋅26 사태로 정치 사회는 한때 심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의 권위주의 통치가 몰고 온 후유증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는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어서 1979년 12월 12일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일부 병력을 동원해서 군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1980). 이 때 민주주의 헌정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진압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도 살상되어, 국내외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신군부 세력은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여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며, 개헌을 추진해서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민주 정의당을 조직하고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1981).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의 구현, 복지 사회의 건설 등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으며, 경제 안정과 수출 증대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과 인권 문제, 각종 부정과 비리로 국민의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두환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강압적 통제에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마침내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확대보기
6월 민주 항쟁
6월 민주 항쟁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