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알게 된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던 흥선 대원군도 서양의 무기 제조술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개항 이후 개화파 인사들은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부도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근대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고자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외국 기술자도 초빙하였다. 이러한 개화 정책에 따라 박문국에서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기기창에서는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전환국에서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개항 이후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분야에서 근대 시설이 도입되었다. 전신이 설치되면서 국제 전신망이 연결되었으며, 궁궐과 상류 사회에는 전화도 보급되었다. 문명의 불인 전등이 경복궁의 밤을 밝혔으며,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서울 시내 일부에 전기가 들어왔다. 철도는 경인선이 개통된 후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 경의선이 부설되었다. 서양 의학이 보급되면서 근대 의료 시설인 광혜원을 비롯하여 많은 병원이 들어섰고, 서양식 건축물인 명동 성당과 덕수궁 석조전 등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서양 문물의 도입은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게 의존했으므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 개화파가 부국강병을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인 사회 진화론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실력 양성론의 근거가 되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사회 진화론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된 서양의 학문과 사상 중에서도 사회 진화론은 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