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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와 백제의 망함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고구려는 백제 및 신라의 반격을 받고, 한강 이남의 땅을 잃은 바 있으나, 이것으로 그 힘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북쪽을 향하여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었다.

즉, 영양왕(嬰陽王)은 당시 혼란된 중국을 통일한 수(隋)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말갈인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대로한 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의 길에 올랐으나 중도에서 실패하고(서기 598년), 다음에 양제(煬帝) 또한 백 여만의 수륙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서기 612년),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교묘한 전술에 의하여 살수(薩水)에서 참패하고, 살아 돌아간 자 겨우 2,000여 명이었다 한다. 그 후도, 양제는 기어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고 수 차에 걸쳐 쳐들어왔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국내의 반란에 의하여 당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당은 고구려에 대하여 화친 정책을 써서, 한 때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었으나, 강경 정책을 쓰는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이민족에 대한 정복 사업을 계속하매, 양국의 관계는 다시 험악하게 되었다. 이 때 고구려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대막리지가 되어 북방에 대한 방비를 엄히 하고 또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쳐서 국세를 올리기에 힘을 기울였다. 고립된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행동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고, 도리어 당의 사신을 가두기까지 하였으므로 당 태종은 수륙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왔다(서기 645년).

당의 대군은 요동성 등 두 성을 떨어뜨렸으나, 안시성(安市城) 안에 있는 고구려 군사의 용감한 반항에 의하여 60여 일에 이르는 치열한 공격에 실패하고, 태종은 헛되이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 후에도 태종은 몇 차례 쳐들어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백제의 최후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의 땅을 잃은 백제는 자연히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에 자주 쳐들어갔으므로, 고립된 신라는 할 수 없이, 그 당시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던 당과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 때 백제는 방탕한 의자왕(義慈王)이 정치를 하여 성충(成忠) 같은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아니 하고, 매일같이 향락에 정신을 잃어 나라의 힘이 점점 기울어갈 때였으므로,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은 이 기회를 타서 먼저 백제를 넘어뜨릴 생각으로 당에 원병을 청하였다.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니, 신라에서도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다.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황산에서 결사적인 방어를 꾀한 백제 장군 계백(階伯)의 장렬한 전사도 보람없이, 서울 사비성은 당과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마니, 의자왕은 하는 수 없이 항복하여 31대 678년으로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서기 6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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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백마 강
부여의 백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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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백제 왕족 복신(福信)과 중 도침(道琛) 등은 왕자 풍(豊)을 맞이하여 왕을 삼고, 백제의 부흥 운동을 일으켜 그 기세가 자못 활기를 띄우더니, 얼마 안 가서 자기들 내부의 불화로 충돌이 일어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멸망

백제를 넘어뜨린 후의 목표는 남은 고구려였으므로, 사비성을 함락시킨 이듬해 당 고종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 원정의 길에 오르게 하였고, 신라 또한 김유신에게 군사와 식량을 가지고 당군을 도웁게 하였다. 그러나 워낙 평양성이 견고하고, 또한 그 해 겨울의 추위가 유난히 심하였으므로, 당과 신라는 그대로 군사를 돌이키게 되었다(서기 662년).

거듭되는 승리에 기세가 오른 고구려도 끊임 없는 전쟁과 흉년에 시달리고, 더우기 영웅 연개소문이 죽자, 나라 위에는 검은 구름이 감돌게 되었다. 즉 소문이 죽고, 장자 남생(男生)이 대신 대막리지가 되니, 그 아우 남건(男建)과 남생들과의 사이에 정권 다툼이 일어나, 마침내 남생은 국내성으로 도망가고, 당의 원정을 청하는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은 이 틈을 타서 이적(李勣)을 시켜 고구려에 침입하게 하고, 신라도 이에 응하여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하니, 고구려는 보장왕 27년(서기 668년) 28왕 705년으로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한 후, 고구려 사람들은 곳곳에서 광복 운동을 일으켰고, 특히 왕족 안승(安勝)을 받든 검모잠(劍牟岑)의 활동은 유명하였고, 또한 신라도 이를 도와 당 세력 구축에 노력하였으나, 결국 고구려의 부흥은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알아두기〉

을지문덕. 수 양제. 연개소문. 안시성. 계백. 성충. 김유신. 소정방. 도침. 검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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