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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오랑캐들과 싸우는 고려(高麗)
  • (3) 이웃 나라와의 관계

(3) 이웃 나라와의 관계

걸안의 침입

걸안(契丹)은 원래 선비족으로서 신라 말기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란 사람이 일어나 요하 상류에 도읍하고, 발해를 멸한 다음(926년), 중국 땅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차차 영토를 넓히더니,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치고, 만주와 중원에 걸쳐 커다란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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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안의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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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땅에 송나라가 일어나고 고려가 송과 더불어 화친하고 있음을 두려워한 걸안은, 압록강 동남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나서, 성종 12년(993)에는 드디어 고려에 침입해 왔다.

80만 대군을 거느린 소손녕(蕭遜寧)이 압록강을 건너매, 고려에서는 중군사 서희(徐熙)를 시켜 나가 싸우게 하니, 서희는 용감하고 교묘한 외교술로써 걸안을 물러가게 하였다. 서희의 외교는 압록강 이동의 땅을 고려에 속하게 하는 커다란 승리였는데, 고려의 커짐과 송 나라와의 교통을 두려워하는 걸안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현종 원년(1010)에 또 다시 침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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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육성
강동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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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까지 들어온 적군에 의하여 모든 시설이 파괴되어 가니, 고려에서는 화의를 하고 걸안군을 물러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강조, 하공진(河拱辰), 양규(楊規) 등은 고려 무인의 기백을 나타내어 눈부시도록 잘 싸웠다.

걸안은 고려가 요구 조건을 실행하지 않는다 하여, 강동의 6성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으나, 고려에서는 듣지 아니 하였다.

고려를 굴복시킬 야심이 있던 걸안은 현종 9년(1018) 또 다시 소배압(蕭排押)을 시켜서 쳐들어왔으니,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은 귀주(龜州)에서 요의 대군을 보기 좋게 무찔러, 다시는 고려를 엿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10만의 적군에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귀주의 큰 승리는, 살수의 대첩 이래의 통쾌한 사실이다. 이후 걸안은 더 고려를 괴롭히지 못하고, 강동 6성을 내놓으라는 요구도 흐지부지되었다.

여진에 대한 정책

송화강 유역에 살던 여진(女眞)은 그 옛날부터 숙신, 말갈, 혹은 읍루라고 중국 사람들이 불러 오던 족속으로, 신라 통일 이후 발해의 일부를 이루고, 압록강 중류, 함경 남도 지방에까지 퍼져서 살았다. 아직 야만적이고 통일 없는 부락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노략질이 자못 심하니, 고려에서는 식량을 주어 달래기도 하고, 귀순한 자에게는 벼슬도 주며, 때로는 정벌로써 징계하였다.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던 여진은 12세기에 이르러, 완안 부족의 오아속(烏雅束)이 나타나면서 차차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더니, 고려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 여진에 대비하여 장군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조직하게 하여, 예종 때(1107) 크게 싸워서 무찔렀고,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아홉 성을 쌓아 동북면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그 후 여진은 아골타(阿骨打)가 나와서 나라를 금(金)이라 하고, 걸안(遼)을 멸망시킨 후(1125), 만리장성을 넘어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 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금의 태도가 점점 교만하여지고, 때로는 무리한 요구도 있었으나, 고려에서는 되도록 순조롭게 평화적인 외교 관계로써 이끌어 나가려 하여, 차차 사대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송 나라와의 문물 교류

당 나라가 망한 뒤에 어지럽던 중국이 송(宋) 나라로 통일되었는데(960), 이 때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걸안은 고려와 송 나라가 가까와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또한 송 나라는 문화 정책을 써서, 국세가 빈약하였고, 또한 외적에게 눌리어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고려에서는 발달된 송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주 왕래하였다.

승려, 유학생이나 사신을 보내는 일에, 걸안이나 여진의 방해가 심하여 주로 해상 교통이 발달되니, 개경에서 얼마 되지 않는 벽란도(碧瀾渡)가 출발점이 되어 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송 나라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 페르샤의 서역 상인들도 많이 출입하여, 외국의 진기한 물건이 들어오고, 고려에서는 은, 인삼, 백지, 가죽, 자개 그릇, 접부채, 화문석 같은 것을 수출하였다.

송나라가 여진(금)에게 쫓겨간 남송 시대에는 국가적인 왕래가 줄어들고 일반 상인들의 왕래가 있을 뿐이었으나, 그들이 가져다 준 결과는 고려의 인쇄술, 주자학의 발달로 나타났다.

〈알아두기〉

야율아보기. 서희와 육성. 강감찬. 윤관과 구성. 아골타. 벽란도. 금(金)과 송(宋)과의 관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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