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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굳어가는 나라의 기초

이씨조선의 일어남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온 이후, 군대의 힘을 손에 넣은 이성계(李成桂)는 토지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경제적인 세력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개경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묵은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니, 이것이 곧 이씨조선(李氏朝鮮)의 시작이었다(1392).

유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이태조는, 고려의 불교 대신에 유교로써 백성들의 사상을 지도하고자 유교 중심의 교육 기관을 많이 만들었다.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 학당(學堂)을 두고, 시골에는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유학을 장려하였는데, 이것은 이조 5백 년의 정치, 문화 및 국민 생활까지 유교 정신에 젖어들게 하는 원인을 만들었으며, 한 편 농업으로써 국민의 주업을 삼고, 지도 장려하여 봉건 사회의 기틀을 잡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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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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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조를 세운 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이 국도(國都) 문제였다. 묵은 세력의 근거지이며 여러 가지 풍설이 오고 가는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옮길 것이 태조 3년에 결정되었으나, 그 동안 왕실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왕자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좋지 못한 소문이 나서, 민심이 자못 어수선하여, 태종 5년(1405)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기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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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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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여러 가지 시설은 잘 마련되었다. 교육 기관, 의료 기관, 방화 시설, 지하 수도, 시장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자세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세종 말년의 통계를 보면, 성 안에만 약 1만 7천 호가 살았다고 하니 그 급속한 발달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한글과 세종 대왕

태종은 여러 왕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한 때 시끄럽던 이조 초기의 정치를 바로잡아 정권을 튼튼히 해 놓았는데, 이태조가 나라를 이루고 태종이 정치의 테두리를 잡았다고 하면, 세종은 문화로 나라를 이끌었다고 할 것이다.

세종은 성품이 온후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어떤 것이 올바른 정치인가를 연구하고 이것을 실천하려 하였다.

민족의 자랑의 하나인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유익한 책-고려사(高麗史),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을 많이 만들어 내게 한 것도 국민의 문화적 교양을 높이고자 함이었다.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와 같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에 의하여 학문의 발달이 볼 만하였고, 이 외에도 음악을 정리하여 아악(雅樂)의 시초를 세우고, 또한 과학 방면에도 뜻을 두어 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하여 국민 생활을 향상시켰으며, 한 편 밖으로는 국경의 경비를 튼튼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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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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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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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아들 세조(수양 대군)는 친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나, 세종의 문화 정책을 받들어 훌륭한 정치를 하여, 안으로나 밖으로 이조의 틀을 잡기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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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륙신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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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인쇄술의 발달과 많은 서적의 발간을 거듭한 성종(成宗)은 이조 문화를 유교중심의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세조 때부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는, 이조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나라의 모든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말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위로는 국초로부터 연이은 현명한 군주와, 아래로는 충신들의 노력으로, 이조 500년의 기초를 꿋꿋이 세웠거니와, 또한 이 때가 이씨조선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

이씨조선은 원 나라와 명 나라가 바뀌는 기회에 이루어져서 명의 뒷받침을 기다렸던 터이며, 더구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조 관리들이라, 명에 대한 외교는 사대주의로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도 명으로부터 결정받았고, 매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오고 가는 사신들과 이에 따라 다니는 무역업자들에 의하여, 약품, 책, 악기, 문방구 등이 들어오는 대신, 금, 은, 모시, 화문석, 자재 그릇 같은 것이 수출되어, 정치적인 왕래와 더불어 문화적인 관계도 더욱 깊어갔다.

이러한 평온한 외교 관계와는 달리, 만주에 있는 여진족과는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큼 충돌이 잦았다. 이성계가 함경도 지방에서 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것이, 이조 건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 만큼, 여진과의 관계는 중요한 영향을 가지고 있었다. 여진은 야인(野人)이라고 불리워 오던 미개 민족인데, 그 야만적인 용기가 가끔 북쪽 국경을 시끄럽게 하므로, 때로는 달래어 귀순하는 자에게 관직도 주고, 또 요구하는 물건을 팔아주면서, 되도록 무사히 지내려 하였다. 그 때는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자리를 정하고, 옷감, 농사 기구, 종이, 쌀, 콩, 간장 같은 것을 그들의 짐승 가죽과 바꾸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야인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자주 국경을 넘어 오므로, 세종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쪽의 육진(六鎭)을 개척하게 하고, 다시 압록강 유역을 다스려, 사군(四郡)을 두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국경이 이조 때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게 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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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초기의 국경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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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이 국경 지방은 야인들에 의하여 가끔 소란해졌고, 이징옥(李澄玉), 이시애(李施愛)와 같이, 중앙의 그릇된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여진을 배경삼아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까지 나타나게 되니, 당시의 정치적 관심이 중앙에만 기울어지고, 산골이 많은 국경 지대에는 급한 때만 대책을 세우는 태도가 후일의 큰 화근을 남겨 놓게 되었다.

〈알아두기〉

위화도 회군. 성균관. 국도 천정 문제. 훈민정음. 집현전. 세종. 아악. 야인. 조선.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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