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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나라의 개방과 새 문화 운동

(2) 나라의 개방과 새 문화 운동

민씨 세도의 나타남

대원군의 10년간에 걸친 정치는 결과적으로 볼 때 차차 민심을 잃고 있었다. 즉 과중한 부역과 무거운 세금은 국민의 원한을 사고, 서원의 정리는 유생들의 반감을 샀으며, 계급 차별의 철폐는 양민의 믿음을 잃고, 천주교의 박해는 국민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이와 같은 세상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민비(閔妃)를 중심한 민씨 일파였다.

대원군은 외척의 자라남을 막고자 하는 마음에서 고종 비를 맞을 때, 일부러 아비 없는 집안에서 맞아 들였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수완 있는 민비는 세자 책립문제로 대원군과 사이가 갈라진 후, 갖은 수단을 다하여 대원군 배격 운동을 일으켜, 드디어 대원군으로 하여금 정권을 내어 놓고, 양주(楊州) 땅으로 내려가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씨 일파의 손에 들어갔고, 대원군과 민씨의 갈등은 이 후 여러 가지 사건을 자아내게 되었다.

나라의 개방

쇄국을 지키던 대원군이 물러나매, 새로 정권을 잡은 민씨 일파는 일본의 강요로 나라를 개방하게 되었다. 새로 일어나는 일본은 우리 나라에 야심을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고종 12년에 운양호(雲楊號)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트집을 잡고 사신을 보내어 무력적으로 수교를 강요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 정세의 옮아감에 비추어, 다음 해 2월에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맺고, 비로소 나라를 개방하게 되었다(1876).

이 조약은 우리가 부산, 인천, 원산 등 세 항구를 열고,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는 등 12조목의 약조를 정한 조약으로, 이에 의하여 나라는 개방되고, 일본 공사가 서울에 들어와 머물게 되었다.

구미 여러 나라와의 수교

굳게 닫힌 쇄국의 문을 연 후 일본과 접촉이 많아지면서, 일본 세력이 차차 조선 안으로 뻗쳐 들어오니 이에 불안을 느끼게 된 것은 청이었다. 청은 호란 이후 우리 나라가 한 때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모든 일을 자주적으로 처리하여 내려왔던 것이나, 청은 우리를 자기 세력권내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세력의 진출에 놀라고 이를 막기 위하여는 서양 여러 나라의 힘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청의 이홍장(李鴻章)이 우리에게 권하여 구미 여러 나라와 통상하도록 주선하였다. 이리하여 고종 19년(1882)에 제물포(濟物浦)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이 성립되었고, 이어서 동년 영국, 도이치와도 조약을 맺었으며, 이리하여 1902년까지에는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 도합 아홉 개의 구미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와 같이 쇄국의 문을 활짝 열고 구미 여러 나라와 교섭을 갖게 된 조선은, 서양 문물이 전하여지게 되고, 사신이 왕래하여,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을 두고 뿌리를 깊게 뻗친 보수적인 세력으로 말미암아 새 문화는 순조롭게 자라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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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대사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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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화의 수입과 개화 운동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에 의하여 쇄국의 꿈을 깬 우리 나라는 일본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주장으로 고종 18년 조준영(趙準永), 홍영식(洪英植) 등 10여 명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 하여 일본에 보내어 근대화한 일본의 문물을 시찰케 하였고, 한 편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하여 60여 명의 학도를 이끌고 청에 가서 새 문명의 기계와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새 시대에 알맞게 관제를 고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어 모든 정사를 보게 하여, 여러 가지 개혁에 착수하였다. 군제를 고치어 이영제(二營制)를 실시하고, 특히 서양식 군대를 조직하여 별기군(別技軍)이라 부르고, 일인 호리모토(掘本)를 교관으로 삼아 훈련시켰다.

이리하여 서양의 발달된 문명이 들어오니, 여러 부문에 새로운 시설과 제도가 실시되어, 고종 19년에는 양반도 장사를 할 수 있고, 서민도 향교나 성균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서양인의 입국이 잦아지니, 서양인에 의한 근대식 학교인 배재(培材), 이화(梨花) 학교가 개교되었다. 근대적인 사회 시설로서,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의료 교육기관, 영어와 서양 문명을 가르치는 육영 공원(育英公院), 신식 기계와 도구를 만드는 기기창(機器廠), 신식 인쇄소로 큰 역할을 하는 박문국(博文局)이 세워졌고, 전환국(典圜局)을 두어 당오전(當五錢)이라는 서양식 화폐를 찍어내고, 한성순보(漢城旬報)라는 신문까지 발간되어, 사회는 크게 변하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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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개방에 따르는 새로운 사상의 수입과 새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없던 모순이 여러 부문에 나타나, 국내는 대립되는 여러 파의 움직임에 따라 복잡하게 얽히어 혼란을 거듭하게 되어갔다.

〈알아두기〉

민비와 대원군. 운양호 사건. 강화도 조약. 수신사. 한미수호통상조약. 신사유람단. 영선사. 별기군. 한성순보. 당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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