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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립에 허덕이는 근세 조선

대립의 모양

개국 이후의 근세 조선의 역사는 수난과 분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수난은 동방 진출을 꾀하는 구미 여러 나라의 움직임과 근대화한 일본의 대륙 침략으로 겪게 된 것이다. 즉 대륙진출을 바라는 일본과 종주권을 부르짖는 청,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남하를 노리는 러시아의 세력이 세모로 대립하여 우리를 싸고 미묘하게 움직여, 까다로운 국제문제를 빚어내었다. 국내적으로는 나라의 개방과 새 문화의 수입이라는 문제로 개화파와 보수파로 분열 대립되었고, 또한 친일, 친청, 친로의 여러 파로 갈리어 국정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변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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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세력이 들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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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소란

앞서 말한 모순과 대립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큰 변란으로 나타났다. 대원군과 민비의 정치적 대립, 민씨 세도의 개화 정치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 새 문화 운동에 의해서 생긴 별기군(別技軍)에 대한 구군인(舊軍人)의 반감, 이러한 보이지 않는 대립이 쌓여 구군인에 대한 급료미(給料米)의 배급 문제를 기회로 폭발되어,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민씨 세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구군인은 민씨의 고관을 살해하고, 대원군과 통하여 일인과 왕궁을 습격하게 되니 일본 공사 등은 인천을 거쳐 본국으로 달아났고, 민비는 겨우 탈출하여 충주(忠州)로 피신하였으며, 정권은 9년 만에 다시금 대원군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원군은 민씨 일파가 개혁한 여러 제도를 뜯어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위세도 전날 같지를 못하였거니와, 개화 정치로의 움직임은 어쩔 수 없는 세계사의 움직임이어서, 한낱 개인의 힘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원군의 새로운 정권도 민씨 일파가 끌어들이는 청의 적극적 간섭을 받아,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청 세력의 침입

민비는 군란을 피하여 충주에 피신하였거니와, 그 무리는 의논한 끝에 영선사 김윤식을 통하여 청국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청은 이 기회에 적극적으로 내정에 간섭하고자 많은 군대를 보내어 대원군을 잡아, 청으로 보내어 가두게 하고, 원세개(袁世凱) 등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한 편 본국으로 도망쳤던 일본 공사도 군대를 이끌고 다시금 우리 나라에 들어와 군란의 책임을 묻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배상금을 물고,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인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킬 수 있음을 약속하는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을 맺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등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임오군란의 결과는 민씨가 다시 나타나고, 청, 일 양국의 군대가 국내에 들어오는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청은 이 난을 이용하여 내정을 간섭하여 세력을 뻗치고자 이 때에 청인 마건상(馬建常), 도이치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를 우리 정부의 고문으로 임명케 하고, 원세개가 서울에 머물러 심하게 정치를 간섭하니, 국내에서는 날이 갈수록 이 무거운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인 개화파의 움직임이 활발하여 갔다.

갑신정변

개국 후 일본에 다녀온 인물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 후 급속히 근대화되어 강력한 국가로 되어가는 일본의 모양을 보고, 이를 본받아 청의 간섭을 벗어나고, 정치를 혁신하여 자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니, 이 무리를 개화파 또는 독립당이라 한다. 그 중심 인물은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원군의 쇄국 정치를 반대하고 나라를 개방한 민씨 일파가 이제 와서는 도리어 청의 힘을 빌어 현 상태를 고집하려는 보수파, 즉 사대당이 되었다.

기회를 기다리던 개화파는 때마침 청이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실패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청의 세력에 눌리어 우울하던 일본과 결탁하여 그 힘을 빌어 고종 21년 10월에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기하여, 식장 근처에 불을 질러 혼란을 빚어내고, 식에 참석하였던 사대당의 대표적 인물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박영효, 김옥균 등은 창덕궁(昌德宮)으로 달려가 국왕을 다른 곳으로 옮겨 일병으로 호위케 하고, 사대당의 인물을 살해하며,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여 근 500년간 내려온 유교 중심의 사대적 정치를 뜯어 고쳐, 근대적인 정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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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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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수의 깨우친 사람들에 의한 이와 같은 변란은 서울에 머물고 있던 청군의 출병으로 삼일천하가 되어버렸다. 정변으로 피신한 사대당이 난을 원세개에게 고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나와 일병을 몰아내고, 독립당의 홍영식 등을 살해하였다. 한 편 민중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니, 일본 공사는 본국으로 달아났고, 박영효, 김옥균 등 중심 인물도 일본으로 망명하니, 이로써 변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정변이 있은 다음 달에 일본은 공사관 습격과 일인 살해의 책임을 묻고자 특별 사절을 파견하니, 우리 정부와 여러 차례 교섭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한성 조약(漢城條約)이 맺어졌다.

〈알아두기〉

임오군란. 갑신정변. 제물포 조약. 우정국. 사대당. 개화당. 창덕궁. 김옥균. 한성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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