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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일 운동으로 나타난 민족의 울분

삼일 운동의 폭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 문화의 모든 부문을 빼앗겨버리게 되자, 민족 전체는 더욱 더 일제 반대의 사상을 굳게 지키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외국으로 망명하였던 애국 지사와 국내의 동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각지에서 맹렬한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한 편 서양에서 국제적인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한국의 대표자를 보내어 일본의 무도한 침략을 호소하고 독립을 간청하였다.

일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윌슨(Wil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부르짖으니, 이 주장은 세계 약소 민족에 큰 파동을 일으키고, 특히 한국에 큰 자극을 주어 본격적인 독립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19년 고종이 일본인에 의하여 돌아가셨다는 풍문이 퍼지자, 민심은 극도로 흥분하여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 선언서를 만들고, 세계 만방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민족의 이름으로써 선언할 준비를 갖추었다.

고종의 장삿날을 앞둔 3월 1일을 기하여 피끓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탑골공원에서는 소리 높이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전 민족은 방방곡곡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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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파고다) 공원
탑골(파고다)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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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립 운동은 온 민족의 외침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랜 시일을 두고 질서 정연하고, 평화적으로 일어난, 정정당당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총칼로써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니 2만에 가까운 겨레가 희생되었다.

3⋅1 운동의 영향

군대까지 동원한 일본의 탄압으로 비록 독립은 찾지 못하였으나, 이러한 큰 힘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움직임을 나타낸 것은 일본 정부에게 새로운 통치 방법을 택하게 하였다. 탄압 정치에 의하여 굴복된 것으로 생각되었던 한민족의 독립 정신이, 탄압하면 할수록 자라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 일본은, 탄압의 손을 늦추어 우리 민족을 회유하기 위하여 문화 정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실시하던 무단 정치를 없애고, 헌병을 경찰과 바꾸고, 교사도 제복과 찼던 칼을 버리게 하며, 몇 개의 신문을 우리 글로 발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등, 전과 같은 폭정을 버린 듯이 정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일본 정부의 올바르고 양심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내부의 경제 상태에 변화가 생기어 극도로 식량의 곤란을 느끼게 되자,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인의 인심을 수습하고 쌀을 많이 만들어 내어 자기들이 갖다 먹도록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 정책은 농촌의 쌀을 증산하는 계몽부터 시작하여, 토지 개량, 관개 시설, 품종 개량 등의 연구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조금 남은 한국인의 토지마저 빼앗으려는 야심을 드러냄으로써 한국인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고, 애써 지은 쌀은 헐값으로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다.

계속되는 독립 운동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을 계속하고자 상해에 모인 망명객들은 1919년 이승만(李承晩)박사를 대통령으로 받들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세우니, 나라 안의 청년 학도들도 다시금 용기를 얻고, 압박자 일제와 싸울 결심을 굳게 하였다. 이리하여 1926년 순종(純宗) 황제의 장례 날을 기하여 다시금 6⋅10 만세 사건이 일어나, 독립 만세의 우렁찬 소리는 삼천리를 진동시켰다.

1929년에는 학생들에 의한 일제 배척 운동이 일어나 200여 학교와 5만 명 학생이 뭉치고 일어서는 커다란 민족의 투쟁인 광주 학생 사건이 일어났는데, 3⋅1 운동 이후 가장 큰 독립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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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사건 당시의 신문 기사
광주 학생 사건 당시의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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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의분이 기회 있을 때마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독립 정신을 내외에 보였거니와, 한 편 애국열에 불타는 의사(義士)들에 의한 의거(義擧)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뒤를 이어 일어났다.

강우규(姜宇奎)는 새로 부임해 오는 총독을 습격하였고, 김익상(金益相)은 식민지 통치의 중심 기관인 총독부에 투탄하고, 다시 상해에 건너가 일본 대장을 쏘았다. 나석주(羅錫疇)는 경제 침략의 앞잡이인 동척회사를 습격하고, 김지섭(金趾燮)은 일본 왕이 사는 궁성 정문에 폭탄을 던지고, 박열(朴烈)은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지어 일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 운동에 대하여 침략자 일본은 우리의 처지를 동정하기는커녕 총칼과 엄법으로 대했으며, 1923년의 일본 토오쿄오 대진재(日本東京大震災)의 어수선함을 틈타, 그 곳에서 살던 동포 만여 명을 죽창과 군도로써 학살하여, 세계사에 보기 드문 죄악을 범하였던 것이다.

〈알아두기〉

1차 세계 대전. Willson. 민족 자결주의. 약소민족. 손병희. 독립 선언. 기미 독립 운동 사건. 일제의 문화정치. 대한민국 임시정부.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 사건. 강우규. 김익상. 나석주. 김지섭. 박열. 동경에서의 동포 학살 사건. 상해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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