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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세 나라로 뭉침

[1] 세 나라로 뭉침

부족 국가의 마지막

우리 나라가 아직 여러 부족 국가로 갈라져 있을 무렵, 중국의 한 무제는 고조선을 공격하여 이른바 한의 군현을 두었다(B.C. 108). 그러나 우리 민족의 끊임 없는 반항에 부딪쳐 20년 만에 진번과 임둔의 두 군은 없어지고, 현도군은 고구려에 쫓겨 만주 서쪽으로 옮겨 갔다. 다만 낙랑군이 근 400년 동안 우리 나라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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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군현
한의 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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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의 문화도 놀라울이만큼 뛰어난 것으로 오늘날 낙랑의 옛터에서 발굴된 거울⋅도장⋅화로 등의 유물로 미루어 보아 낙랑의 문화가 금속 문화에 속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장신구⋅칠기 등도 우수한 것이 많으며, 이 때 세워진 점제비(秥蟬碑)는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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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의 금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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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의 옻칠한 대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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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일어남

부여족과 고구려족은 남만주 일대에서 중국의 세력을 막아내고 있었는데, 서기 1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왕을 칭하고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을 정하고 현도⋅랴오뚱⋅낙랑⋅옥저 등을 정벌하여 고대 국가의 모양을 갖추었다. 2세기 말인 고국천왕 때에는 을파소(乙巴素)가 나타나 진대법(賑貸法)을 써서 영농 자금을 대 주는 등 산업을 장려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나라의 힘이 강해졌다. 랴오뚱 지방에 있던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입하고 또 선비족의 침입도 받았으나 고구려는 이를 다 막아 내었다. 미천왕은 낙랑을 합치고(313), 현도를 정벌하여 나라를 평안케 하였다.

백제의 흥기와 신라

한강 유역에 살고 있던 삼한의 한 무리가 서울 부근에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이왕 때에 이르러 나라의 제도를 갖추고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고구려에 비하면 약 200년이 늦은 셈이다.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영토를 넓히고 북쪽으로 쳐들어가서 고구려와 다투기에 이르렀다.

한편 남쪽의 여러 고을도 뒤늦게 경주 부근의 사로(斯盧)를 중심으로 부족 연맹을 이루어 신라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낙동강 유역에도 6개의 가야 연맹이 생겼다, 신라가 늦게 일어난 것은 외래 문화와의 접촉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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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서울
삼국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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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용어》

한사군, 낙랑 문화, 점제비, 진대법, 사로국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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