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침입
랴오허 강 부근에서 아포기(阿保機)가 거란족을 모아 발해를 멸망시키고 이름을 요(遼)라고 고쳤다. 성종 때(993) 8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으나 서희(徐熙)의 외교로 도리어 강동(江東)의 6주가 고려 땅임을 인정하고 물러 갔다. 고려와 송이 가까와짐을 두려워한 거란은 다시 침입하였으나 강조(康兆)⋅하공진(河拱辰)⋅양규(楊規) 등이 잘 싸워 물리쳤다.
요는 세 번째로 다시 쳐들어 왔으나 귀주에서 강감찬(姜邯贊)에게 크게 패하여 다시는 고려를 넘겨다 보지 못하였다. 난 후 고려는 불에 탄 개경을 다시 재건하고, 북방 국경선에다 천리 장성을 건설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여진과의 관계
압록강 유역과 함경도 지방에 살던 여진족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고려를 부모의 니라로 섬기더니 12세기에 이르러 완옌 부족(完顔部族)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고려와 자주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윤관(尹瓘)은 별무반(別武班)을 따로 조직하여 이들을 몰아 내고 함흥 평야의 9성을 빼앗아 동북 방면을 안정시켰다.
그 후 아쿠타(阿骨打)가 나와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고 요를 멸망시킨 후, 송 나라까지 쳐들어가며 고려에 대하여도 오만한 태도로 나왔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송 나라와의 교류
고려는 당의 뒤를 이어 다시 중국을 통일한 송과 바닷길을 통하여 교역하였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국제 항구로 발달하여 왜상(倭商)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도 수은⋅용치⋅수정⋅향유 등을 고려에 가지고 와서 우황⋅칠기⋅부채 같은 물건과 바꾸어 갔다.
송이 금을 괴롭히므로 남쪽으로 옮겨간 뒤에도 교역을 계속하여 비단⋅의복⋅약재⋅악기⋅서적 등을 많이 들여와 인쇄술과 학문 등을 발달시켰다.
《주요 용어》
강동 6주, 9성, 완옌 부족, 별무반, 벽란도, 서희, 강감찬, 아쿠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