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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종교 개혁

[2] 종교 개혁

루터의 개혁

중세기의 교황과 교회는 권력이 커지고 살림이 넉넉해지자 믿음보다도 세속적인 일에만 골몰하였다. 교황은 별도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고 종교 재판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핍박하는 등 교회는 날로 부패해 갔다.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국민의 신앙심도 줄어 들자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아졌다. 영국의 위클리프와 독일의 휘스는 14세기에 이미 종교 개혁 운동의 필요를 부르짖은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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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
위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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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0세는 성 페드로 성당의 건축에 쓴다고 면죄부를 상품처럼 팔아서 신도들을 어지럽혔는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교류를 주장하고, 95개조를 들어 중세 교회와 교황의 처사를 비판하였다(1517). 그 후 루터는 교황과 황제에게 쫓겨났으나 발트부르크 성에서 성서를 독일 말로 번역하며 계속 종교 개혁에 전심하였다.

새로운 종교 운동

루터의 주장에 찬동하는 무리들은 종래의 카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교파를 이루고 여기 저기서 카톨릭파와 충돌하였다, 그러나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회의에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어 신교는 유럽 여러 곳에 번져 나갔다.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와 캘빈이 나와서 엄격한 규율을 지키게 하며 노동의 신성을 부르짖고 상공업이 성한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지에 그 세력을 펴 갔다. 영국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동은 다 캘빈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국의 헨리 8세는 교황과 충돌하여 새로 영국 교회를 만들고 왕이 직접 교회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뒤에 성공회(聖公會)의 시초가 되었다, 엘리자베드 여왕이 즉위한 뒤 이를 국교로 삼고 반대파를 몰아 내게 되니 청교도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종교 전쟁

카톨릭 내부에서도 자발적인 개혁 운동이 일어나 로욜라 같은 사람은 예수교단을 만들어 기독교 정신을 되살리고 해외 전도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군주들의 이해 관계와 신구 교파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서 유럽은 한동안 종교 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나 북부의 신교도들이 따로 네덜란드를 세워 독립하였다(1606). 영국과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니아 간에도 종교 문제로 말미암아 싸움이 일어나서 영국은 에스파니아의 무적 함대(無敵艦隊)를 격멸하고 해상권을 잡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캘빈파와 카톨릭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바아토로뮤의 학살과 같은 잔인한 사건이 있었으나 1598년의 낭트 칙령으로 신구 양파 사이에 동등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종교 전쟁은 비단 종교 문제로서 뿐 아니라 새로 일어난 군주들의 권력 다툼과 관련되어 정치적 싸움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사이에 유럽의 지도는 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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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엽의 유럽
16세기 중엽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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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종교 전쟁은 17세기에 들어 독일을 중심으로 막바지에 달하였다. 신교와 구교의 세력이 비슷하고 아직도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독일 지방은 서로 반대파를 누르고 외국의 세력을 끌어 들여 유럽의 전 국가가 전쟁에 휩쓸렸다.

30년이나 계속된(1618~48) 이 전쟁으로 모든 나라는 지쳤고 마침내 베스트파알렌 조약을 맺고 종교적 평등과 신흥 국가의 독립을 승인하고 말았다. 오랫 동안 계속되었던 종교 전쟁이 끝나자 영국⋅프랑스 등은 다시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여 전제 정치를 해 나갔다.

《주요 용어》

면죄부, 프로테스탄트, 청교도, 위그노파, 성공회, 낭트 칙령, 30년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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